오병익 충청북도교육삼락회장

[오병익 충청북도교육삼락회장] '깔깔, 까르르' 쑥 개떡? / 쌀가루에 굴러 '버무리'가 될 거야 / 뜸(약쑥을 살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는 치료방법) 뜨다 꽃불처럼 빨개진 얼굴 / 부끄러워 숨어도 '쑤욱~' 나온다 했지  / 필자의 동시 '쑥' 전문이다. "학교에 사람이 있어요" 손때 묻은 동화책인줄 알았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아이들 꿈을 그린 학교문집일까? 빗나갔다. 학교폭력 대책 모델 342쪽과 워크북182쪽으로 묶어 고통스러운 경험을 녹여낸 인성교육(학교 괴롭힘 처방) 실전이었다.

충청북도교육청 이동갑 장학관의 작전명 EFRG, 공감-용서-회복을 거쳐 또 다른 성장 체온으로 싸안은 그렁그렁한 눈물·설렘까지 고스란히 담겼다. "가르친 아이들이 먼 훗날 나를 어떤 교사로 어떻게 기억되기 원하는가?"란 물음표와 함께 시(詩) '벗겨지지 않는 도금'을 빚어 예견과 편견의 금지 팻말을 세웠다. 똥끝이 탈 지경으로 끔찍한 사례에도 여전히 피해자로 항변하며 자발적 정의조차 어줍잖은 가해 포옹, 최소한 잘못이 적은 쪽이 많은 쪽보다 손해 봐서는 안 될 과제다.

'친구가 무섭고 선생님은 더 무섭고 학생들은 정말 무서운 학교'의 폭력, 학대 등 인성실종이야말로 서로 부딪치면서 조정·타협하는 문화에 대한 도전이다. '스스로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거나, 자신을 통제 또는 절제하여 해낼 수 있는 힘', 곧 자율역량의 직무유기다. 교원, 퇴직경찰관과 퇴직군인, 청소년상담사, 사회복지사 등 거의 모든 초·중·고에 배치돼 위험으로부터 예방·치유까지 꼭 붙들어 준다. 문제는 '학교에 사람 있어요?' 다. 물음표(?)하나 더 붙였을 뿐인데 자존심이 흔들린다. 그 때 그 때 다른 방관자로 전락한 이유다. 시간은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한다. 그렇듯 역할 수행자마다 내가 너이면서 우리로 상처와 직면하는 시간을 갖고 고통 쯤 걷어내는 화해수술을 거친다면 '학교에 사람이 있어요!' 역시 느낌표( ! )로 채워진 인성의 참쑥 아니겠는가.

아이 보호 구역인 스쿨존(school zone)의 처벌은 강화됐지만 위반사례는 오히려 늘었다. '천천히'라고 적힌 표지판을 비웃기라도 하듯 트럭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잠시 후 쌍방향에서 덤벼든 승용차들이 엉켜 오도 가도 못하고 경적을 울려댄다. 분명 가해행위다. 등교 중인 아이들은 인도를 채운 주차 차량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차도로 걷는다. 마지노선까지 붕괴된 양심 때문에 위험을 달고 사는 학교 앞 풍경, 가해자 피해자 동조자 방어자 방관자로 뒤 범벅인 채 기적처럼 하루를 넘긴다.

미국 등하굣길은 대부분 교장·교감·담임의 안내를 받으며 학교 버스를 이용한다. 아이들 보행을 방해하는 막무가내 주차도 없다. 그런데 우린 다르다. 문제 일으키고도 책임 떠넘기기와 자신의 잘못조차 핑계에만 익숙하다. 친구가 좋고 선생님은 더 좋고 학생들은 정말 좋은, '학교에 사람이 있어요…' 새 학년 사람 숲 되는 '인간의 존엄 회복' 노래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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