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2장 부어라 마셔라
| ▲ <삽화=류상영> |
화단에서 오른 쪽에는 속이 깊어서 바닥이 컴컴한 우물이 있다. 양철 지붕 밑에 걸려 있는 도르래를 이용해서 물을 푸는 우물 맛은 여름에는 시원했다. 그 탓에 늘 수박이나 참외 등 과일이 담겨있는 광주리가 우물 속에 잠겨있기 마련이다.
상주옥의 주인 모서댁은 근처 주민들이 우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이른 아침부터 밤이 늦게까지 대문을 열어 두었다. 상주의 모서가 고향이라는 주인의 인심이 후해서는 아니다. 사방 백 보 이내에는 우물이 없었다. 근처에 우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대문을 걸어 잠그고 물 단속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동네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서 당장 학산을 떠나라고 난리법석을 피울 것이다. 이왕 우물을 개방할 바에는 동네사람들한테 인심이나 얻겠다는 속셈에서였다.
화단 왼쪽으로는 절의 요사寮舍처럼 일자형의 한옥이 있다. 쪽마루가 딸린 다섯 개의 방은 객실이다. 일 년 중에 대목이라 할 수 있는 담배 수납 때가 되면 하루 종일 장작을 때서 뜨끈뜨끈한 객실이 모자랄 지경으로 손님이 넘쳐난다. 하지만 평소에는 장 전날 외지에서 오는 약장사들이거나, 새벽에 장이 열리는 인삼장에 오는 떠돌이 장사꾼들이다. 무싯날에는 기생들이 방을 차지하고 있거나, 기생들과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는 손님들이 이용을 하기도 한다.
막 정오가 지난 시간이다.
상주옥에서 제일 큰 방인 매화실 앞 들마루 밑에는 십여 켤레의 구두가 자로 줄을 맞춘 것처럼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 한쪽에는 옥색고무신과 꽃무늬고무신 두 켤레가 얌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정오의 햇볕을 직삼각형으로 받고 있는 격자무늬 창호지 문 안에서는 간간히 여러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가끔 여자의 웃음소리도 섞여있다. 부면장님도, 지서장님 너무하셔, 교장선생님은 나이를 꺼구로 잡수시는 거 가텨유. 하는 교태 섞인 목소리가 햇살이 하얗게 내려 앉아 있는 마당으로 양념처럼 흘러나오기도 했다.
정지 안에는 평소와 다르게 영수네만 있지 않았다. 오늘은 음식 솜씨가 좋아서 먹고 살만한 집에서 잔치를 하거나 생일잔치 때면 빠짐없이 부르는 창래댁도 와 있다.
그네들은 나이 차이를 떠나서 서로 하는 일이 달랐다. 신선로를 만들고 조기를 구워서 가늘게 썬 계란채에 실고추를 뿌리는 일이나, 잡채를 만들고 봄나물을 참기름과 소금으로 무치는 일은 젊은 창래댁이다. 창래댁이 만들어놓은 쇠고기전에 볶은 참깨를 뿌리고, 파전을 붙이는 일이나, 접시를 닦고 수저에 광을 내는 일은 영수네가 맡아서 하고 있다.
매화실 안에는 학산면들의 유지들이 건교자상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피나무로 상판을 만들고 소나무 다리를 한 건교자상은 모두 세 개였다. 상 위에는 신선로 상이 들어오기 전에 입맛을 돋구기 위해 ob맥주 몇 병과 땅콩에 북어포를 담은 접시 등이 놓여있다.
"부면장님이 사시는 겅께 마시기는 마시지만, 대체 이 맥주 한 잔 값이 을매여, 보리쌀로 치믄 한 되 값은 넘겄지?"
"아따. 교장선생님은 누가 교육자 아니시라고 할까봐, 낮 뜨거운 말씀만 골라 하시고 있네유. 아무리 사람 밑에 사람 읎고, 사람 위에 사람 읎다고 하지만 세상 사는기 어디 그류. 하다 못해 개새끼도 팔자가 있어서 부잣집 개는 배불리 먹고, 똥구녘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구석 개새끼는 비루먹은 강아지마냥 빌빌 싸기 마련이잖유. 하물며 사람 아뉴. 보리죽 먹을 팔자를 안고 태어 난 놈은 슬이나 추석에도 보리죽을 먹을 끼고, 괴기 반찬에 쌀밥 먹을 팔자믄 생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전쟁 통에도 닭다리를 뜯게 되는거이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