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임시정부 100주년 특집-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권용일
▲ 제천 자양영당 내 권순명 집터 전경.

11 권순명 (權順明·1876년 8월 11일~미상)

김춘쇠 의병장 등 동료 600명과 
경기 양주·가평, 강원 홍천서 
군자금품 모으며 日 수비대와
여러 차례 교전하는 등 의병활동
15년 옥고 치렀지만 재판 기록뿐
사망사실조차도 확인되지 않아

권순명은 충북 제천 근좌면 장담리(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출신으로 후기의병에 참여해 활약한 인물이다. 
제천 장담마을은 한말 의병운동에 중요한 곳이다. 화서학파의 정맥을 이은 유중교가 살았고 그의 제자 유인석이 한 때 거주했던 곳이다. 권순명은 근처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유인석의 위정척사사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907년에 들어와 일제의 헤이그 특사사건을 기화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강제해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케 했다. 이에 민족의 무력이 상실된 것을 통분해 하던 대한제국의 병사들은 스스로 의병부대를 조직해 일제에 투쟁하든가 아니면 기존의 의병부대에 투신해 일제에 항전함으로써 의병전쟁을 국민전쟁으로 발전시켜 갔다. 
이에 지방의 포군(砲軍)으로서 근무했던 권순명은 35세인 1908년 8월 김춘쇠 의진에 참여해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김춘쇠 의병장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6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양주군·가평군, 강원도 홍천군 일대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면서 일본군 수비대와 여러 차례 교전하는 등 의병활동을 벌였다. 
특히 그는 1908년 9월 30일 강원도 홍천군 남천리(南川里) 전투에 참여해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김춘쇠 의병장 등 30여 명의 동료 의병들이 전사해 의진이 붕괴됐지만 그는 잔존 의병들과 함께 항전을 지속해 갔다. 
그리하여 이듬해 10월 30일 김한경(金漢京)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강원도 횡성(橫城)군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등 의병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피체돼 1910년 3월 23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징역 1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권순명은 일개 농민 신분으로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체포돼 15년의 옥고를 치렀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일제의 재판 기록뿐이다. 사망사실조차도 확인되지 않아 그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할 수가 없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권순명의 생가터는 현재 자양영당과 제천의병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12 권용일 (權用佾·1883년 5월 11일~1971년 9월 5일)

이강년 부대로 충청·강원·경상
일대 돌아다니며 일본군과 격전
수차례 승리 … 고종 편지 전달
동료들 체포 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 조직 후 연락책 활동

권용일은 충북 청풍군 원서면 덕곡리(현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사진)에서 태어났다. 1907년 원주에서 병영의 무기를 거두러 가던 이강년(李康秊)을 만나 의병부대에 뛰어들었다. 
이강년 부대는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 등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제천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권용일은 다른 의병들과 매복, 일본군을 급습해 의병으로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얼마 후 40여 의병부대가 강원도 영월군 주천에 모여 의병진의 재편성을 추진했다.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에 추대했고 권용일은 우군선봉장에 임명됐다. 제천 천남전투 이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주로 우군장 이중봉(李重鳳)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의병부대는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경북 풍기·문경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때 탄환이 부족해 의병 봉기 당시 원주진위대에서 얻어 배양산에 숨겨둔 것을 가져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도총독장 이만원(李萬源)과 함께 숨겨둔 탄약을 성공적으로 가져왔고 이를 계기로 도선봉이 됐다. 
갈평 전투 이후 이경년 부대는 충청, 강원, 경상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고 수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907년 12월 영춘 복상골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의병이 체포되고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로 다수의 장졸들이 흩어졌는데 권용일 또한 본진에서 떨어져 백남규(白南奎) 등과 함께 이듬해 봄까지 소백산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했고 1908년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 
이강년 의병부대가 다시 남하하자 권용일은 병력을 합쳐 경북 북부지역인 서벽·재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제천 인근의 까치성전투에서 이강년이 체포되자 권용일은 신분을 숨기고 이강년의 옥바라지를 했다. 하지만 1908년 10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강년의 사형이 집행됐고 이후 의병의 기세가 크게 꺾이자 수배를 피해 은둔했다. 
이후 권용일은 국내에서의 의병투쟁에 한계를 깨닫고 김규흥(金圭興)과 이범구(李範九), 김규철(金圭喆) 등과 함께 고종이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출국길에 나섰다 
하지만 일제에 발각돼 그를 제외한 3명이 체포됐고 홀로 정경로(鄭敬老)라는 가명을 쓰고 산삼 상인으로 가장해 인천에서 소금 배를 타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국땅에서 유랑생활을 하던 그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해 7년 동안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가 사이의 연락책을 맡았다. 해방 후에는 충주에 살고 있던 옛 동지 백남규와 왕래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1971년 88세로 사망했고 장례는 단양군민장으로 치러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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