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전 복대초 교장·시인

 

[교육의 눈] 박종순 전 복대초 교장·시인 그 많은 꽃들이 어디에 숨어있다 나오는 것일까? 이팝나무에 조롱조롱 매달린 하얀 쌀알, 알맞게 늘어진 등나무꽃 보랏빛 불등, 그리고 과수원길 넘어 산언덕 어디나 향기고운 하얀 아카시아꽃이 마음밭을 두드린다. 제자의 누나가 결혼한다하여 대절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창밖의 꽃들과 새 만남을 이룬다. 그보다 제자의 아버님과 누나 그리고 매형되는 사람도 처음 만나게 되니 설렌다. 벌써 20년 전 특수학교에서 담임하여 제자사이가 되었는데 내가 어쩌다 교장선생님이 된 것이 자랑스럽다며 어머니가 해준 떡을 안고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첫 부임교로 찾아온 일이 있다. 그의 하나뿐인 누이가 결혼하여 매형을 얻으니 나까지 든든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세 사람 처음 만나보니 꽃처럼 고왔다.

며칠 후 5.17일 미술대전시상식 참여로 광주에 갔다가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가고 싶었다. 민주화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이 다시 필 수 없는 꽃이 되었음을 알았을 때 만남은 가슴부터 저려왔다. 말없이 누운 700여기의 나란한 묘 그 사이에 나도 누워 시든 꽃이라도 되어야했는데, 1980년 당시 교대를 갓 졸업한 나는 초임교사로 분필들고 블랙보드만 사랑하던 어린선생님이었다.

묘역 우측 끝부분에 행방불명자 묘역을 만났을 때 발걸음이 더 이상 떼어지지 않았다. 39년이 흐른 지금까지 아들, 딸의 시신을 찾지도 못해 봉분도 없이 외로이 세워진 작은 비석에 부모들이 써내려간 비문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름만 달랑 비문 한 줄 없는 백비는 더욱 외로이 내일을 기다릴 뿐. “무등을 오르는 사람들이 너의 조객들이구나. 암매장된 너의 육신을 깃발처럼 흔들며 어서 나오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아직 찾지못한 그 깊은 슬픔과 아픔을 무엇으로 기울 수 있는가? 다음날 기념식을 위해 수천 개의 의자가 놓여졌고 탐색 견 일곱 마리가 주변을 더듬고 있다. 민주화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나는 묘역에 누워계신 한 분 한 분을 처음으로 가슴에 안아 보았다.

다음 날 TV를 틀어보니 5.18 제 39주년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그 묘역 앞에서 열리고 있다. 육천여명이 참석하여 저마다의 소회와 다짐을 내놓았다. 미스타 문의 열띤 기념 연설에 약간의 위안을 얻고 모교로 서둘러 향하였다. 청주교육대학교 총동문회 및 체육대회 날이 한날로 겹친 것이다. 바람이 드세고 비가 내려 개회식마저 할 수 있을까 염려되었는데 운동장에서 기별배구를 못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 사범 1회부터 주관기수인 교대 40회까지 수많은 선후배를 만났다.

왠지 후배 선생님들의 눈치를 살펴보게 된다. 학교의 민주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스승의 날을 ‘교육의 날로 하든지 아예 없애든지’ 말들도 많았다. 교육이 살아야 인물이 양성되고 나라가 사는 것인데 사소한 일 하나하나 물고 늘어져 교사를 흔들려는 학부모님들의 행태가 도를 넘고 있단다. 알아야할 것은 교사가 흔들리면 귀한 자녀는 더욱 흔들리어 속수무책이 된다는 사실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 그 많은 선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선생님의 산뜻한 발걸음 소리에 지는 꽃잎도 웃음 짓는 새 5월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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