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백남규 (白南奎·1884년 8월 22일~1970년 2월 19일)

 

충주시 금가면 월상리 출신
경북 순흥지방서 의병 일으켜 
부하 800명 거느리고 접전
1908년 체포 8년간 옥고
이승만의 정치 제안 거절하고 
'우국노인회' 회장 맡아
애국정신 함양에 힘써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백남규는 충북 충주시 금가면 월상리 출신으로 경북 순흥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한때 부하가 800명에 달했으며 이강년의 우선봉으로서 강원 영월 사리치에서 선유원 홍우석의 100여 수비병을 크게 격파했다.

백남규는 대한제국 사관학교인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1907년 안동진위대 부위로 근무했다. 1907년 한국군이 일제의 책동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자 동지를 규합해 경상북도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00명을 거느리고 왜병과 접전을 벌였다. 
경북 문경의 의병장 이강년이 강원도 횡성의 봉복사(鳳復寺)에서 유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만났다. 이강년의 인품에 감복해 합진할 것을 결의하고 부하를 거느리고 들어가 이강년 의진의 우선봉으로 임명됐다.

그는 신식 군사교육을 받은 핵심 간부의 한 명으로 중요한 전투마다 활약을 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항상 육혈포를 지니고 있으면서 사살한 일본군의 귀를 잘라 꿰어 말에 달고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1907년 7월 제천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려 도선봉장(都先鋒將)이 됐고 9월 10일 갈평전투에서 남산에 배치돼 40여 명의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해 많은 물자를 노획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0월 6일 이강년 부대는 덕포의 독산에서 서쪽 고지에 배치돼 있는 20여 명의 영월 수비대를 만났다. 함께 싸우기로 한 병력이 모두 모이지 않자 백남규는 홀로 일본군이 배치된 곳으로 달려가 주변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에 힘입은 의병부대는 일본군과 9시간 동안 접전했고 탄환이 떨어져 물러났다.

백남규는 이 무렵 선유사 홍우석이 왜병 20명과 싸리재를 넘어 주천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좌선봉 하한서, 우선봉 권용일과 함께 매복, 적을 기습했다. 
이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계속 전투를 벌이던 이강년 부대는 11월 죽령전투에서 패배하며 큰 타격을 입었고 잠시 휴식기를 갖는다. 이때 백남규는 부친이 적에게 잡혔다는 말을 듣고 잠시 귀향했다가 다시 돌아와 우선봉을 맡았다. 
이강년 의진은 여러 다른 의진과 합진해 전투를 벌였다. 인제 백담사에서 3월 12일, 안동 서벽에서 4월, 봉화 내성에서 4월 6일, 안동 재산에서 4월 8일에 적과 크게 접전했는데 백남규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후 1908년 6월 이강년이 체포된 뒤 김상태가 의진의 지휘권을 행사했고 백남규는 부대 일부를 나누어 가지고 서벽, 내성, 아산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해 큰 성과를 올렸다. 
백남규는 1908년 12월 충주헌병에게 체포당해 공주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았다. 8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그는 단양일대에서 재기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17년 중국 상해로의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음성 개화실에서 다시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됐고 15년간 옥고를 치르다 출소했다.

하지만 아내와 자식마저 일본 앞잡이들에 의해 살해됐고 일가친척들도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광복 직후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사람을 보내 함께 정치를 하자고 했지만 그는 김구 선생과 뜻을 같이한다며 거절하고 '우국노인회' 회장을 맡아 애국정신 함양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생전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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