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서상렬 (徐相烈·1856년 2월 10일~1896년 6월 13일)

임오군란 후 포천으로 낙향
제천 유중교 문하에서 수학
갑신정변·갑오개혁 일어나자 
충격 … 의병봉기 추진 실패
이필희·오인영·배시석과 
의병 일으켜 별동부대 활약
재기 위해 서북 황해·평안도 
북상길 개척에 나섰다 순국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서상렬은 충북 단양 출신으로 제천·단양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서, 호남7읍의 도의장 및 중군장으로 토산, 금천 등지에서 활동했다. 
서상렬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기도 했으나 1882년 임오군란 후 묄렌도르프가 등용되는 것을 보고 포천으로 낙향했다. 영평의 김평묵(金平默)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고 1889년 제천의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93년 유중교 사후에는 한동안 장담 선비들의 강학을 이끌기도 했다. 

서상렬은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나라를 걱정하며 병석에 눕기까지 했다. 
특히 1894년 발표된 변복령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바로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유인석의 만류로 중지했다.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했을 때도 의병봉기를 추진했으나 호응하는 사람이 없어 실패했다. 

그는 재차 의병봉기를 마음먹고 있었는데 유중교 문하의 동문인 이춘영과 안승우가 김백선의 포수부대를 기반으로 원주 안창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12월 3일 제천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제천으로 돌아왔다. 
제천에서 이필희, 오인영, 배시석과 함께 의병봉기에 참여했다. 동지들은 서상렬을 대장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이필희에게 양보하고 군사가 됐다. 
1896년 유인석을 대장으로 한 호좌의진이 결성됐고 서상렬은 소모대장으로 주로 본진을 지원하는 별동부대에서 활약했다. 

또 호좌소모토적대장(湖左召募討賊大將)이 돼 원용정과 함께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보냈고 이에 여러 의병장들이 호응해 참가해 왔다. 이들은 예천군에 모여 서상렬을 추대, 맹주를 삼았다. 
서상렬의 통솔 아래 영남의 연합의진은 2월 16일 상주 태봉에 있는 일본군 병참을 공격했으나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제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관군의 공격으로 호좌의진이 오랫동안 근거지로 장악하고 있던 제천의진이 무너지자 단양방비를 맡았으며 4월 18일 유인석의 명령을 받고 풍기로 넘어갔다가 다시 4월 21일에 영춘에서 본진과 합류했다. 

재기를 도모하던 제천의병은 서북의 황해, 평안도 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기로 하고 북상길 개척에 나섰다. 도중에 서상렬은 여러 차례 적과 접전했는데 6월 12일 낭천(현 강원도 화천)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결국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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