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

 

일정이 많아 조각보처럼 아귀가 맞아야 하는 날, 장마가 시작됐다.

비 때문에 늦어질 것을 예상하고 30분쯤 더 일찍 '나눔 플러스' 주방으로 향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새벽부터 준비해 놓은 밥과 반찬을 통에 담고 도시락을 가방에 담았다. 원성동 인근 명단을 받아들었다.

파트너로 배달을 맡았던 여학생이 빠지는 바람에 새로운 남학생과 빗속을 달려 동네로 들어갔다.

시작부터 팀워크가 서툴렀다.

골목에서 그치는 내비게이션, 어떤 골목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는지 서툰 학생이 우산을 쓰고 이리저리 뛴다. 차 안에서 오른쪽 왼쪽을 외쳐가며 손발을 맞췄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난감한 표정으로 도로 나오는 학생을 따라 함께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슬레이트 지붕에서 낙수가 줄기차게 내렸다.

쪽방이 다닥다닥 붙은 마당에서 어르신을 찾았다. 전화도 통화가 안 돼서 방방이 문을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몇 번째 방에 가서야 문 앞에 준비해 놓은 빈 도시락통을 발견하고 큰소리로 어르신을 부르며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광이 나도록 닦은 구두 두 켤레가 나란히 눈에 들어왔고, 말끔하게 머리를 빗은 어르신이 목욕하느라 듣지 못했노라며 계면쩍게 화장실에서 나오셨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시락을 전달하고 뛰어나오니 길을 막은 내 차 때문에 갈 길이 지연된 운전자의 성난 경적이 폭우에 잠겨있었다.

비상 깜빡이를 켜고 골목을 빠져나와 시계를 봤다. 왔던 곳인데도 불구하고 낡은 단독주택 셋방을 바로 찾아내기 어려웠다.

손발이 잘 맞지 않으니 더뎠다. 다 마치고 12시 약속 장소까지 이동하려면 빠듯할 듯 해 학생을 재촉했다.

여우비처럼 잠깐 비가 그치자 급한 마음에 우산도 없이 뛰었다가 오는 길에 비를 흠뻑 맞은 학생은 안경을 닦으며 선하게 웃었다.

누군가 음식을 배달했는지 오토바이 바퀴가 물을 가르며 앞선다. 비가 와도 들숨과 날숨처럼 어김없이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 숙연해진다.

조급하게 보낸 오전 시간을 보상하듯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다. 근처 아트센터로 가서 미술전시관을 일행과 같이 관람하고 돌아와 식당에 주차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가 고장인가? 핸드백을 뒤집어 쏟아보니 자동차 열쇠가 없었다. 도시락 배달을 위해 입었던 노란 조끼 주머니에 차 키를 넣은 채 학생만 내려놓고 달린 것이다.

열쇠가 없어도 마저 달릴 수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열쇠를 찾고 남은 일정을 수행했다.

물 폭탄 같은 비가 쏟아지다 그치기를 반복할 때마다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가 뉘엿해졌다.

집으로 가는 길에 화재가 났다는 재난 문자를 봤다. 잠시 신호 대기 중 재난 문자를 살펴보는 순간 가슴이 쿵쿵거렸다.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상황이 다급해서 회사 단체 카톡방에 두정동 화재 사건에 대한 정보를 구했다.

집으로 가던 길을 회사 쪽으로 돌리며 같은 건물에 입주한 사장님께 전화를 시도했다. 건물 관리소장도 통화 중이었다. 심장이 천둥처럼 뛰었다.

회사 근처에 도착할 때쯤 우리 건물이 아니라는 연락을 받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무실에 다시 들어가 이곳 저곳을 살폈다. 있는 그대로라는 게 얼마나 특별하고 감사한 일인가.

물도 무섭고 불도 무서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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