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 충청북도교육삼락회장

[오병익칼럼] 오병익 충청북도교육삼락회장

일반적으로 인재(人才·人材)란 ‘학식과 능력, 재주 따위를 갖춘 뛰어난 사람’으로 정의 하고 있다. ‘인재 양성’을 닦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얼마나 막연한 사치성 단어였으면 정작, 학교구성원은 제쳐두고 울타리 밖에서 아우성인지 현기증이 서린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인재 정의조차 흔들리고 있다. 부모 권세로 주변을 폭넓게 주무른(또는 알아서) 합격보증서 때문일까. ‘명문·보통·똥통’ 도 힘의 서열 이었다. 특례·특별·부정 입학(취업)에 이골 난 사람들 ‘신상 털기’는 땅벌을 건드린 듯 쏘고 쏘인다. 아이가 부서지도록 수능닦달만 해 온 세상 엄마와 아빠의 분노, ‘실체적 진실’로 아리송하다.

충북도와 도교육청 간 소위 ‘명문고 육성 (인재 양성 차원)’은 아직 엇박자다. 도교육청은 ‘모든 학생의 개성을 존중한 재능계발과 함께 행복한 교육’ 이란 기둥을 제시한 반면, 도는 ‘지적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의 상위권 대학 진학’을 곧추세운 상태다. 평등과 수월의 밑그림부터 확연하게 다른 잣대에서 충북민간단체총연합회 토론회 등 공론화 과정까지 단계적 숙성에 들어갔다.

사람은 결코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공모델일지언정 수십 년 전 대안을 정답으로 고집하는 건, 인재 아닌 둔재의 부채질과 무엇이 다르랴. ‘학교 등급’을 매겨 명문대 합격을 위한 경쟁, 교육후진국이나 하는 짓이다. 저마다 색깔이 다른 평준화 차별화를 두고 착시현상은 걷히지 않으니 우려스럽다. 찬성과 반대로 대립은 논란만 부추기게 된다. 늦었지만 타협을 가능케 하는 돌파구가 중요하다. 경색된 인재 양성과 ‘명문고’ 실체, 그 매듭부터 풀어야 한다.

사람마다 그 쓰임새가 다르다. '무한 경쟁' 시대에선 '세상을 바꿀 다양한 인재'를 부른다. ‘인재 양성’은 곧 학교 교육과정과 수업방식 진화다. 바야흐로 인적자원 경쟁시대야 말로 글로벌 공통가치를 꼽고 있다. 2020년 이후, 시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인재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스펙은 투기보다 강하다. 출산율 최하위권이니 사람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 단 한 아이 재능이라도 놓쳐선 안 된다.

충청북도·도교육청, 시군·교육지원청 간 교육경비보조금의 확대(예: 괴산군 원어민 배치, 증평군 형석고 지원 등)가 절실하지만 기억 속 먼산바라기일 뿐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학교통폐합도 그 중 하나다. 소규모학교 ‘학생 학습권’, 갑론을박에 주춤거려선 안 된다. 잃는 게 훨씬 많다면 지나친 억측인가? 소수초·목도초 구성원이 스스로 일군 통합작품을 보라. 교육과정 변화와 함께 학부모 만족도 역시 예사롭지 않다. 당당하고 의연한 대승적 차원의 판단과 결단의 시너지라는 안팎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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