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울체된 기가 쌓여 발병

기(氣)는 자연과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체에너지이다. 만물은 끊임없는 기의 흐름에 의존하여 스스로를 영위하므로 기의 흐름이 막히거나 거칠어지면 손상되거나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훈풍은 만물을 소생시키나 태풍이나 무풍은 다치거나 썩게 한다. 자연에서 기의 흐름은 바람으로 대표되어 항상 만물을 어루만지듯이 인체에서도 기의 흐름은 끊임없이 이루어져 전신을 영위한다. 혈액 순환은 기의 흐름에 따른 것이다.

기는 낮이나 밤이나 쉼 없이 운행한다. 기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식생활, 수면생활, 성생활 그리고 칠정(七情)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칠정이 가장 중요하다. 기뻐하거나 화내거나 애달파 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놀라거나 무서워하는 감정이 지나치면 기의 흐름이 왜곡된다. 특히 화내는 것은 가장 해롭다. 살아가면서 기막힌 일을 자주 당하거나, 하고자 하는 바를 자주 좌절당하면 기가 가슴에 울체되기 쉽다. 가슴에 울체된 기는 쌓여서 울화(鬱火)가 되는데 이로 인하여 발병하는 질병을 울화병 또는 화병이라고 한다.

화병이 있으면 가볍게는 가슴이 답답하고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것이 좀 더 깊어지면 가슴이나 머리가 아프거나, 목이나 등줄기가 뻣뻣하거나, 간혹 배가 쥐어짜듯이 혹은 칼로 찌르듯이 아프거나, 소변이나 대변이 시원치 않거나, 팔다리나 온몸이 자주 붓거나, 팔다리가 노곤하거나, 절로 화가 자꾸 치밀어 오르거나, 밤에 자려고 누우면 더욱 가슴에 열불이 나서 찬바람이나 찬물을 마셔야 하는 증상 등이 발병하고, 더욱 깊어지면 자궁·난소·유방·갑상선·뇌 등에 종양이 생길 수 있다. 화병은 독소를 많이 만들어내므로 다양한 질병이 발병한다. 요즘 미혼 여성들이 자궁·난소·유방·갑상선·뇌 등에 병변이 자주 생기는 것도 화병과 관련이 많다.

화병은 시집살이하던 어머님들이 겪던 병이다. 가슴에 쌓인 한과 울화가 많으나 이를 풀지 못하고 살다보니 병이 된 것이다. 요즘은 대체로 시집살이를 하지 않으니 예전의 어머님들이 겪었던 화병을 앓을 리 없지만,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생활이 울화병을 양산한다. 직장생활이라는 것이 예전의 시집살이와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요즘은 남녀 구분 없이 화병에 시달린다.

전쟁이 나면 울화병을 앓는 분들이 많아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도 울화병으로 고생하였다. 우리는 평화 시기에 살고 있으므로 울화병과는 거리가 멀 것으로 생각되지만, 빠른 변화와 다양한 정보로 사회가 항상 용광로처럼 끓고 있어 전쟁 못지않은 상황 속에 살고 있다. 미디어 발달에 힘입어 여러 가지 가치가 공존하지 못하고 서로 부딪힌다.

산업화·정보화 과정은 경제적·시간적 여유를 생성하여 삶의 질을 향상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시간에 쫓기는 각박한 삶은 정신적 여유마저 앗아가 버렸다. 분초를 다투는 생활 또한 엄청난 스트레스를 만들어내면서 기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기의 흐름이 원활치 않아 발생하는 화병은 모든 질환의 근원이 되므로 되도록 빨리 치료해야 한다. 체질과 병증에 맞게 침·뜸과 한약으로 근본을 다스리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화병이 깊어 자궁·난소·갑상선·유방·뇌 등에 종양이 발생한 경우에도 근본을 다스려야종양을 억제하고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 종양만 제거하는 것은 여름 장마에 버섯 한두 개 따는 것에 불과하다.

식생활, 수면생활, 성생활 그리고 칠정 등에 절도가 있으면 화병을 예방할 수 있다. 누구나 스트레스에 똑같이 반응하지는 않는다. 생활을 규칙적으로 영위하고 절도가 있으면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이 커진다. 무절제한 생활은 질병을 야기하고, 절도 있는 생활은 건강을 보장한다.

▲ 박 성 규 예올한의원 원장 한의학 전문위원·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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