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3장 초승달 아래서

▲ <삽화=류상영>

"그라고 보믄 요새 세상 참말로 살만한 세상여. 아! 톡 깨 놓고 야기해서 대통령이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여. 구관이 명관이라고 이승만이 새로 대통령이 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항께 우리가 이 밤중까지 팔자 좋게 술잔이라도 기울 수 있는 거잖여."

김춘섭의 등 뒤로 들판의 보리밭이 보인다. 윤길동은 신문지로 만 봉초를 피우면서 노릇노릇해 지고 있는 보리밭을 바라본다.

한 배미가 열 마지기가 되는 논에는 제법 통통하게 살아 오른 보리가 미어터지도록 자라고 있다. 그 논뿐만 아니고 문전옥답이라 할 수 있는 동네 앞의 논은 거의가 이병호 소유다. 부자는 똥을 누고 있어도 돈이 들어온다고 문전옥답은 다른 논 보다 소출도 훨씬 많다. 곡식은 농민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크는 법이라서, 잡초 한 포기를 뽑아도 더 뽑고 거름이 되는 개똥 한 삽을 뿌려도 더 뿌릴 수 있는 까닭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 말이여. 우리찌리니께 하는 말이지만 그 대단하다고 하던 신익희가 호남선 열차 안에서 급사하지 않고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쳐. 민주당에서는 선거기간 내내 고무신은커녕 탁주 한잔 대접하는 일 읎었잖여. 신익희가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한 장 토막이나 술타령을 할 수 있겄냐 이 말이여?"

"춘셉이 자네는 술 마시다 뒷간 댕겨 왔나? 뜬금 읎이 식익희가 대통령이 된다니? 신익희가 살아 있다고 해도 워치게 대통령이 된다는 거여. 내 생각으로는 신익희가 살아 있었다고 해도 우리 동리에서 신익회한테 표를 줄 사람은 한 명도 읎을 껴. 당장 우리 향숙이도 지덜 선생님이 그라는데 이승만대통령을 안 찍으믄 우리나라가 망한다고 떠드는 판국잉께"

"뇡협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떨어지믄 대출 연장도 안 된다고 하간 하드만."

"학교 선생이다, 뇡협직원들, 하다못해 편지 배달부들까지 이승만을 찍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는 마당에 신익희가 열 번 살아 있어도 되겄어?"

"소문이 깡통이구먼. 죽은 신익희의 관을 들고 서울역에서 내링게 먼 일이 있었는지 알기나 하능겨? 사람들이 죽은 신익희 관이라도 본다고 을매나 많이 모여 들었는지 굉장했다는 겨. 신문에서 두 명이 죽고 스물 및 명이 다쳤다고 났댜. 구속 된 사람도 칠백 및명이나 됐다는 걸 보믄 굉장했던 개벼."

김춘섭은 술잔을 비워내고 해룡네 집 쪽을 바라본다. 술주전자를 들고 나오는 혜룡이는 춤을 추듯 걸어오고 있다. 초저녁에 바가지 가득 퍼 마신 술이 덜 깬 것 같았다.

"자! 자! 죽은 신익희가 살아 올리는 읎응께 술이나 마셔. 춘셉이 자네는 냘 새벽에 나무팔러 갈라믄 그만 마셔야 되는 거 아녀?"

황인술이 들고 다니는 주전자로 윤길동에게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황인술은 주전자를 들고 다니면서 일일이 한 잔씩 따라주고 있는 중이다. 한잔 주고 한잔 받아 마시다 보니 취해버렸다. 하지만 기분 좋은 날이다. 학산에 사는 자유당 면책임자인 문기출에게 그 동안 현금으로 받아서 동네사람들에게 술을 사준다는 명분으로 흥청망청 쓴 돈만 해도 이만 환이 넘었다. 그런데다 오늘은 당선축하 회식비조로 만 환이나 받았다. 동네사람들 모두 떡이 되도록 마셔도 오천 환이면 충분하다. 나머지 오천 환은 고스란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가 않았다.

"구장님, 내가 이까짓 탁주 몇 잔에 취하믄 김춘셉이 아녀유. 오늘 같은 날 배 터지도록 술을 안 마시믄 언제 마신다고 냘 나무 팔러 갈 걱정을 한 대유?"

<계속>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