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살며생각하며] 황혜영 서원대 교수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1899-1986)의 단편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1939)에서 작중 인물인 작가 삐에르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 야심찬 시도를 한다. 그는 ‘돈키호테’를 쓰고 고치고를 끊임없이 반복하더니 모두 파기하여 결국 남은 것은 ‘돈키호테’ 1부 9장과 38장, 22장의 일부뿐이다. 단편인 이 작품에서 가장 매혹적이었던 대목은 화자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1부 9장 일부분과 그 부분을 다시 쓴 삐에르 메나르의 글을 대비해주는 장면이다.

화자는 먼저 세르반테스의 문장을 예로 든다. “...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이어 메나르가 다시 쓴 문장을 보여준다. “...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두 문장은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문장만 보면 메나르가 세르반테스의 글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여길 만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문장은 세르반테스가 한 창작과 완전히 동일해질 때까지 가보는 불가능한 시도에서 나온 절대적인 창작이다. ‘돈키호테’를 다시 쓰기 위해 20세기 프랑스 작가 삐에르 메나르가 한 것은 세르반테스 당시 스페인어에 능통하고,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고, 무어인이나 터키인들과 전쟁을 하고, 1602년부터 1918년까지 유럽 역사를 기억에서 지우고,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끼기와 다름없어 보이는 극단적 형태의 메나르식 다시쓰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우선 어떤 창작도 완벽히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이전에 축적된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유산들에서 영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보르헤스는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 서문과 본문을 통해 자기는 작품의 의붓아버지일 뿐이며 우연히 구하게 된 아라비아 역사가의 글을 스페인어로 번역을 시켜 자기가 독자들에게 전한 것일 뿐이라고 고백해놓은 대목에서 영감을 받아 ‘돈키호테’ 다시 쓰기를 구상하게 되었다. 세르반테스의 ‘의붓아버지’ 글쓰기 전략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보르헤스는 그것을 모든 새로운 창작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서 영감과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 메나르식 다시쓰기는 독서의 의미를 돌아보게 해준다. 그의 다시 쓰기는 작품 원 작가의 정신과 삶을 그대로 살아내는 읽기와 함께 진행된다. 그는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며 이미 있는 책을 외국어로 다시 쓰고 고치기를 끊임없이 집요하게 반복하였고, 수천 페이지의 글들을 찢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문장은 매번 같을지라도 그의 삶이 작품 읽기에 수렴되어 가는 동안 계속 변화되고 있다. 그는 다시 쓰기로 몸으로 읽는 ‘되기’, 원작의 생기와 정신을 자신에 각인시키는 작업을 보여준다. 메나르식 다시쓰기는 자아를 비우고 작품의 존재로 채우는 전적인 몰입과 공감의 ‘궁극’의 독서를 소설적인 형태로 형상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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