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4장 소슬바람으로 바느질을 하며

▲ <삽화=류상영>

보은댁이 피붙이에 불과한 승철이를 안고 들어 온 것은 그 해 가을이다. 추수가 끝나고 들판에 부는 바람이 지푸라기를 허허롭게 날릴 즈음이기도 하다.

옥천댁은 반년 전에만 해도 소식이 없다든 들례가 어느 사이에 남자 아이를 낳았는지 손가락을 짚으며 헤아려 볼 틈도 없었다. 황망한 기분으로 핏덩어리 승철을 안아서 안방에 눕혔다.

승철이는 세상의 빛을 본지 겨우 한 밤이 지났을 뿐인데도 집을 떠나 낯선 방에 왔다는 걸 알고나 있는 것처럼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옥천댁은 젖이 나오지 않아서 급하게 미음을 끓였다. 그것을 그냥 식혀서 주면 지어미의 체온과 틀려서 토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에 머금었다가 온기로 적셔서 젖을 먹여주듯 조심스럽게 입안에 흘려 넣어 주었다.

"원래, 귀한 손은 어렵게 크는 벱여. 그래야 부모가 자식 귀한 줄 알고 정성을 들이는 벱이거든."

승철이는 자주 놀랐다. 바람소리만 커도 까물어쳤고, 한 밤중에 개짖는 소리만 요란해도 파랗게 질려서 숨이 넘어갔다. 그럴 때마다 동네에서 침을 놓는 순배영감이 달려와서 경기를 달래주었다.

병약한 승철이 만 두 살이 되던 해에 전쟁이 일어났다. 막 모심기를 끝낸 논에서 모가 땅냄새를 맡기도 전에 북쪽사람들이 무조건적인 남침으로 중앙정부는 대전에서, 다시 대구로 피난을 갔다. 모산 사람들도 피난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술렁거리기는 했지만 결국 지은 죄가 없으니까 피난 갈 필요가 없다는 여론이 우세해서 모두들 집을 지키기로 했다.

"굉무원들은 현직에 있든 퇴직을 했던 무조건 씨를 말린다는 거여."

하지만 모산에서 유일한 공무원인 이병호는 방심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공무원들은 씨를 말린다는 소문이 두려워서 피난길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온 가족이 모두 피난을 갈 수는 없었다. 병약한 승철이를 돌보아야 할 옥천댁과 늙은 부모를 남겨두고 아들 이동하를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남과 북이 대치를 하는 전쟁기간 동안 모산은 북한군의 지배를 받는 기간과, 남쪽 정부의 지배를 받은 기간이 있었다. 북한이 지배를 하는 동안 옥천댁의 시조부와 시조모는 둥구나무 그늘을 피로 물들이며 무참하게 대창에 찔려 살해를 당했다.

시대가 바뀌어 유엔군과 국군이 진격을 하면서 북한군이 후퇴를 했다.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귀향을 한 이병호는 부모들을 찔러 죽여야 된다고 선동한 자들이 순배영감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병호는 동네사람들을 동원해 비봉산 어둠골에 숨어 있는 형제를 찾아내서 둥구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아 교수형을 시켰다.

백여만 명이 죽고, 역시 비슷한 숫자의 선량들이 실종을 한 전쟁은 3년 만에 끝이 났다.

다행이 모산사람들 중에서는 이병호와 순배영감을 제외하고는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사람들은 없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은 이병호의 부모와 순배영감의 자식 형제들뿐이었다.

순배영감의 자식 형제들이 친일파는 처단해야 한다고 선동 할 때는 함께 죽창을 들고 이병호의 부모를 찔러 죽였다. 피난길에서 돌아 온 이병호가 순배영감의 자식형제들을 죽일 때는 같이 횃불을 들고 어둠골의 토끼굴을 뒤졌던 모산 사람들은 난감했다. 그들은 어느 한쪽 편에게만 사과를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전쟁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기로 작정을 했다. 또한 양심의 가책 속에 전쟁의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에는 현실이 너무 춥고 배가 고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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