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4장 소슬바람으로 바느질을 하며

▲ <삽화=류상영>

그래서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들 보다 더 빠르게 전쟁을 기억을 벗어나려고 농사에 매달렸다. 그 탓에 불과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모두 예전처럼 순박하고 착한 농민들로 변해 버렸다.

"죄가 있기루 치자믄 자식 앞세우고 안직까지 질긴 명줄 유지하고 있는 내가 잘못이지. 누굴 탓하겄슈."

"자식 앞세운 부모 맘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백주 대낮에 대창에 찔려 참살을 당한 우리 부모님 명운도 빌어 줘야 할 거유"

순배영감과 이병호도 피차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었으니까 그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고 약속을 했다. 결국 전쟁은 이병호 부모와 순배영감의 두 자식을 희생양으로 내 놓은 다음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동안 세월은 무상하게도 겨울이면 어김없이 소박한 눈이 내렸고 봄에는 자운영꽃 향기가 들판을 뒤덮었다. 여름밤이면 둥구나무 밑 여기저기 멍석이나 가마니를 깔고 자는 사람들이 부엉이 울음소리를 꿈결로 들으며 잠을 잤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사람들은 지게나 달구지를 이용해서 이병호에게 도조를 받쳤다.

도조를 받치고 남은 나락으로 세금을 내고 면소재지 쌀가게에서 빌린 돈을 갚고, 얼마 남지 않은 나락을 품고 겨울잠을 자듯 긴 가난의 터널 속으로 잠입을 했다.

하지만 승철의 몸은 별로 낳아 지지 않았다. 어릴 때보다 빈도수는 줄어들었지만 조그만 상한 음식을 먹어도 채하기 일쑤고, 한 밤중에 뒷간에서 본 옥천댁의 그림자를 보고 놀라서 새파랗게 넘어갔다. 그 때 마다 보은댁은 어린 점순이를 시켜서 원수의 부모인 순배영감을 불렀다.

"휴! 이것도 다 인연이여. 내가 경기 들린 면장댁 손주한테 침질을 할 줄 누가 알았겄어."

순배영감은 처음에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승철의 진맥을 집었었다. 그러나 횟수가 거듭될수록 이것도 운명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서 침을 놓아 주었다.

"워쩌겠슈. 안직까지 우리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응께 산 사람은 살려 줘야지……"

보은댁도 동네에 침놓는 사람이 두 명만 되도 순배영감을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배영감을 미워하기 전에 대를 이어야 할 승철의 경기를 갈아 앉히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순배영감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리야 읎겄지만, 행여 딴 생각을 먹고 승철이를 차별했다가는 천벌을 받을 줄 알어."

승철이 앓아누우면 들례 집에 머물고 있던 이동하도 모산으로 들어왔다. 이동하는 승철이 아픈 원인이 옥천댁의 탓이라도 되는 것처럼 윽박질렀다.

"만약 좁쌀만큼이라도 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믄 벌써 천벌을 받아서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할뀨. 외려 지는 당신한테 문제가 있다고 봐유. 옛날부터 어린아의 병은 질르는 정성이 부족해서 생기는 거라고 했슈. 승철이가 누구유. 다른 자식도 아니고 장차 이 집안의 대를 이어갈 아들아뉴. 그릏게 중요한 아들을 아비라는 사람이 돌 볼 생각은 안하고 날이면 날마다 엄한 데로 돌고 있응께 승철이가 건강해 질 이유가 읎잖유."

옥천댁은 이동하의 속셈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들례가 약간 바보스러운 기색이 있기는 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첩으로 앉히기에는 근본도 모르고 과거가 복잡한 여자다. 더구나 씨받이에 불과한 여자다. 재산도 가질 만큼 가졌고 공무원 신분이면서 미천한여자를 계속 가까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우회적으로 따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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