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살며생각하며] 황혜영 서원대 교수

예전에는 가까운 사람들 전화번호는 저절로 외워져, 전화를 걸 때면 손가락이 번호를 기억하듯 자동으로 번호를 눌렀다. 전화기에 전화번호를 저장하게 되면서부터는 머리에서는 전화번호들을 차츰 잊게 되었다. 굳이 안 외워도 되는 전화번호까지 쓸데없이 신경 쓰지 않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외울 수 있는 전화번호를 세어보라면 한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내 안의 기억이 줄었다. 전화번호를 한 예로 든 것이지만 오늘날 정보통신망과 스마트기기가 가져온 기억과 지혜의 혁신을 누리며 살게 되면서 나 자신의 내면도 스마트해진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가 들려주는 문자의 발명이 가져온 유익과 그 이면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스마트폰 생활이 가져온 변화의 양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라며 파이드로스에게 고대 이집트에서 수와 계산법, 기하학과 천문학은 물론, 장기 놀이와 주사위 놀이를 발명하고, 또 문자까지 발명했다는 테우트 신이 이집트 왕 타무스를 찾아가 자신의 발명품들을 이집트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할 필요가 있음을 알리고자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왕에게 자신의 각 발명품의 유익에 대해 설명하다가 문자에 대해 설명할 차례가 되자 테우트는 문자는 기억과 지혜의 묘약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집트 사람들을 더욱 지혜롭게 하고 기억력을 높여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타무스 왕은 테우트의 말에 문자는 “그것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기억에 무관심해지게 해서 그들의 영혼 속에 망각을 낳을 것이며, 글쓰기에 대한 믿음 탓에 바깥에서 오는 낯선 흔적들에 의존할 뿐 안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힘을 빌려 상기하지 않게 될 것”이라며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타무스 왕은 문자란 기억의 묘약이 아니라 ‘상기’의 묘약이며 문자로 인해 가르침을 받는 일 없이 많은 것을 듣고 되고, 자신들이 많이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대부분은 무지하고 상대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그가 주는 것이 지혜의 겉모양이지 진상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타무스 왕이 말한 문자에 대한 비판 때문에 문자와 기록이 가져다주는 유익이 완전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문자와 기록을 통해 수많은 사유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고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 파이드로스와 나눈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이천년도 지난 지금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것도 플라톤의 기록 덕분이다. 다만 타무스 왕의 경고는 문자가 주는 유익뿐만 아니라 그 이면도 함께 인지하도록 상기시켜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자로 기억을 ‘상기’하면서 내 안에서 기억한다고 믿는 대신 내 자신의 힘으로 지혜의 진상을 보고자하는 깨어있는 의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타무스 왕이 문자의 유익에 반해 제기한 비판은 스마트폰이 삶에 가져온 유익 그 이면도 성찰해보도록 해준다. 점점 더 빠르고 더 커지는 사이버공간 속 지혜와 정보들에 의지할 때, 내 안의 지혜도 함께 자라고 있는지 들여다보며, 스마트기기를 열 때와 차단할 때의 균형을 의식적으로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