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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비극의 현장…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노근리 유족회 정은용 회장
박병훈  |  news@ccdail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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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7.06  1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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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사건은 반세기 전에 발생한 사건으로 한·미 양국이 1년 3개월간 진상조사를 실시한 것그 자체가 성과다.

그리고 지난 2001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노근리사건에 대한 유감표명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이 사건 또한 한·미관계사(韓美關係史)측면은 물론 인권사(人權史)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사단법인 노근리유족회는 노근리사건 피해자 당사자로서 자신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수년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으며, 공동조사 기간 중이던 2000년 12월 한국 국회에서 미국 정부에 보내는 '노근리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의결됐다.

그리고 노근리유족회는 2002년에 노근리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청원한 이후 대국회 활동을 강화했다.

그로인해 지방자치단체나 시민단체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2004년 2월,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이끌어 냈다.

이 노근리특별법에 의거해근리사건 희생자와 피해자들에 대해 심사가 이뤄졌고, 현재 사건 현장 4만여 평 부지위에 노근리평화공원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정은용 노근리유족회장(87)은 1970년대 중반부터 노근리사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지난 1994년 노근리사건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했다.

이 소설을 통해 노근리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으며, 한·미 공동조사 시에 중요하게 활용되기도 했다.

또한 노근리유족회의 연구결과는 국내외의 연구자들에게 꾸준히 제공됐는데 그 결과 노근리사건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논문들이 국내외에서 계속 발표되고 있다.

노근리유족회는 2000년 11월, 국회 '인권포럼'과 공동으로 노근리사건 관련 인권포럼을 개최했고, 2007년 8월에는 제1회 노근리 국제평화학술대회를 열었으며, 지난 2008년 11월 제2회 노근리 국제평화학술대회를 무사히 마쳤다.

이외에도 2005년 이래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인권과 평화에 대한 강의와 한국의 문화,예술에 대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세계대학생 노근리인권평화캠프''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또한 노근리유족회는 인권증진과 평화증진을 위해 노근리 인권사진전시회, 미술전시회, 평화기원음악회, 인권백일장 및 독후감대회 개최등 문화예술적인 활동과 노근리평화상 제정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영동=박병훈기자
▨노근리 사건이 무엇인가?

노근리사건은 1950년 7월 25일부터 5일간 충북영동군 영동읍 하가리 및 황간면 노근리 일원에서 미합중국 군인에 의해 피난민들이 살상을 당한 사건이다.

1950년 7월 26일 정오쯤 피난민들이 철로 위를 걸어서, 그 선두가 노근리 쌍굴 서쪽 약 100m 지점까지 접근했을 때, 미군 등이 나타나서 이들의 앞을 가로 막고 무선전화로 연락하여 미군 항공기 2대가 피난민들을 폭격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 폭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쌍굴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자 미군들은 이들을 가두어 놓고 쌍굴 양쪽으로부터 기관총 사격을 했으며 3일간 계속했다. 이때 젊은 사람들은 탈출했으나 어린이, 여자, 노인들은 쌍굴을 탈출하지 못해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현재 유족회에서는 무엇을 진행하고 있는가?

우리 유족회에서는 희생자유족 명예회복, 희생자 위령사업, 노근리사건 진상규명 등에 대하여 1960년 10월부터 우리 정부 및 그 산하기관에 진정서를 무려 30여차례에 걸쳐 제출하였다.

1999년 9월 29일 ap통신이 노근리사건을 보도하게 되자 한ㆍ미 양국 대통령 지시에 의해 노근리사건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2001년 1월 12일부터 1년 3개월간 한ㆍ미 양국의 대령ㆍ중령ㆍ소령으로 구성된 진상조사반이 각각 노근리 사건 조사를 끝내고 당시 미국 클린턴대통령은 노근리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우리 정부에서는 국회를 통과한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2004년 3월 5일 법률 제7175호로 제정ㆍ공포하고, 노근리사건 희생자에 대한 심사를 갖고 2005년 5월 23일에는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위원회를 개최하여 상해, 사망, 실종 등 희생자 218명과 유족 2170명을 확정했다.

▨그 당시 잃은 가족이 있었는가?

나는 그 당시 경찰로 근무하고 있어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아내와 큰아들 정구필(5)과 딸 정구희(3)를 안고 피난길에 올랐다.

7월 25일 저녁무렵에 미군 10명이 트럭을 타고 와서 남쪽으로 피난하라고 하여 500~600여 명의 사람들이 부산 방면으로 피난을 하였다.

그러던 중 미군은 26일 노근리 근처 철도와 쌍굴 있는데서 쉬라고 하며 전투기 2대가 날라와서 폭탄을 투하 했다.

그때 집사람은 팔에 파편을 맞았으며 큰딸은 즉사 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27일 새벽에 도망 치던 중 큰아들 구필이도 아내품에 안겨 죽었다.

▨앞으로 유족회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우선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부분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

또한 현재 추진되고 있는 희생자 추모 및 유족확인 사업, 추모공원 조성 및 그 성역화 사업등을 계속 추진 할 것이다.

▨가장 보람되고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노근리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 가장 보람을 느꼈다.

그때의 기분은 이루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빨리 피해보상 부분이 이뤄지지 않아 안타깝다.

또한 회원 및 임원들이 먼곳에서도 영동까지 오느라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누가 활동비를 주는 것도 아니고 농사를 짓다가도 기자나 노근리 관련으로 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일손을 놓고 달려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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