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박사

[충청의창] 심의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박사

오늘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인종 1년 한성 건천동(현재 중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세상을 떠난 지 422년이 흘렀지만 ‘민족의 성웅(聖雄)’이라는 수식어가 상징하듯 한국사회에서 이순신이 지닌 위상은 특별하다.

충무공이 나라와 백성을 구한 인물로 추앙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가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이순신 조카 이분(李芬)이 쓴 『행록(行錄)』을 바탕으로 충무공을 재해석한 『수군제일위인(水軍第一偉人) 이순신』을 집필하여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면서 조명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작업으로 ‘성웅(聖雄)’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에서 단재는 ‘임진왜란’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왜변, 임진란, 왜란, 임진지사 등 객관적 기술어와 함께 칠년전쟁이란 말을 썼다. 왜란이지만 한편으로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은 무너진 조선의 내부를 침통하게 드러내 동란이 안팎에서 함께 발발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충무공은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옥포, 적진포, 사천, 당포, 1·2차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장문포, 명랑, 노량해전에 참여해 23전 23승으로 불후의 전공을 세웠다. 우리 후손들이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본받아야 할 것으로는 충효와 애민 정신, 뛰어난 리더십과 전략전술, 타고난 문장력과 창의력, 불굴의 투지와 인내력 등이다.

그러면 충무공은 언제나 모든 일에서 승리했을까? 그렇지 않다.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하며 정의롭고 용감했지만 28살이던 1572년(선조 5년) 훈련원 별과(訓錬院 別科)에 응시하였지만 실패했다. 왼쪽 정강이가 부러져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완수하였지만 낙방한 것이다. 물론 4년 뒤인 1576년, 그의 나이 32세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재수를 했던 것이다.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 옥고를 치르고 백의종군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러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우리 함선 12척과 일본의 함선 330척의 대결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말은 유서와 같았다. 마지막 유서였다. 원균이 패퇴한 12척의 배, 그러나 끝내 승리했다. 선조 31년인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전무후무한 국난을 겪고도 교훈을 찾지 못했다. 뒤이은 당쟁, 세도정치, 쇄국, 망국이었다. 류성룡은 전쟁 후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시경(詩經 小毖篇)』의 “앞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의 환란을 조심한다(予其懲而毖後患)”고 밝혔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역사는 반드시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게 만든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