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5장 6월의 동화

▲ <삽화=류상영>

이 집에서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은 이병호다. 하지만 이병호는 전답을 관리하고, 그것들을 늘려가는 일에만 몰두할 뿐이지 집안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은 이동하의 몫이다. 이동하는 곧 실질적인 가장인 셈이다. 그런데도 이병호는 빈말이라도 이동하에게 집안의 가장이자 부면장으로 체면을 지키라는 말 한 마디 없었다. 방관은 곧 무언의 승낙인 셈이다. 옥천댁은 이동하의 부재에 대해서 이병호가 화를 내는 적을 본 적이 없었다. 보은댁도 이동하의 부재를 두둔하는 편이지 조강지처인 옥천댁을 배려하지 않았다.

옥천댁은 언제부터 인지 눈에 보이지 않게 이 집안에서 자신만 배제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배제당하는 것만큼 들례가 눈에 보이지 않게 이 집안에 편입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그려, 나 한테는 자식들이 있구먼. 언진가 세월이 해결을 해 주겄지.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건 살아남기 위한 자기방어적인 기재이기도 했다.

바람소리가 들창문을 긁고 지나간 뒤에 감꽃이 떨어지는 소리가 투드득 들려온다.

옥천댁은 비로소 안심했다는 얼굴로 다시 한땀한땀 바느질을 해 나가기 시작한다.

바람이 자고 누군가 들창문에 가죽으로 된 장막을 늘어트린 것처럼 방안에 외로움에 물이 든 정적이 고여 온다. 외로움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고 혼자 앉아 있는 한 밤의 정적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에도 귀가 열리는 법이다.

옥천댁은 네 번째로 태어 날 아이가 입을 배냇저고리를 만들다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서 들창문을 바라본다.

들창문은 창호지를 발랐다. 오전에 햇살이 내려앉으면 창호지를 파고드는 뽀얀 햇살이 경대를 비춘다. 그럴 때의 들창문은 살아서 움직이는 피조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밤이 되면 한데와 방안을 가리고 있는 얇은 종이짝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옥천댁은 들창문은 바라볼 때 마다 밤에도 들창문이 흐느적거리며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늘 밤처럼 입 안으로 뜨겁게 들이마시는 한숨으로 시간을 야금야금 적셔가는 날의 들창문은 망치로 두들겨도 끔쩍도 하지 않는 무쇠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6월 하순의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잔잔했다.

하늘이 맑아서 하얀색 감자꽃 가운데 노랗게 튀어 나온 꽃술이 더 노랗게 보이는 들판에는 나비들이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또랑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기라도 하면 감자꽃들은 일제히 바람 부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부드럽게 몸을 비튼다. 감자꽃은 아름다웠지만 감자밭 주인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꽃이다.

감자 밭 주인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얼굴로 밭이랑 사이를 걸어 다니며 감자꽃대를 뚝딱뚝딱 따내서 버렸다. 감자꽃을 따 내지 않으면 감자가 굵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그 뿐만 아니라 감자꽃을 따낸 다음부터는 감자밭에 물
을 주어서도 안 된다. 식물에 있어서 물은 절대적인 영양분이다. 다른 채소는 꽃이 피고 나서는 더 많은 영양분을 공급해서 열매나 줄기를 살찌게 만들지만 감자는 그렇지가 않다. 영양분을 계속 공급하게 되면 줄기는 살이 찌지만 감자알은 굵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줄기가 말라비틀어질수록 감자알은 굵어진다. 이른바 한 몸이면서도 어느 쪽인가는 굶주려야 어느 한 쪽이 살이 찌게 되는 것이 감자다.

감자밭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병호의 논에서는 모내기가 한참이다.

오늘 중으로 모를 내야 할 분량은 열다섯 마지기나 돼서 놉을 얻은 숫자는 스무 명이 넘었다. 마을 전체 가구 수가 삼십여 가구밖에 안 되는데 스무 명이 넘게 모를 내다보니까동네는 조용했다. 놉으로 뽑히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는 괜히 일손이 잡히지 않아서 자기 일을 접어 두고 이병호의 논에 온 사람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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