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혜 충북대 교수
객원 논설위원

"엄마! 이 숙제 나랑 같이 해야 해요" 어느 금요일 저녁에 뜬금없이 막내가 알림장을 쑥 내밀었다. '환경보존을 위한 체험하기'가 오늘의 숙제 였으며, 그 아래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1. 가족과 하루에 물 20ℓ만 쓰기.

2. 플라스틱 제품 사용하지 않기.

3. 일회용품 사용하지 않기.

4. 비닐류(비닐봉지, 랩 등) 사용하지 않기.

조금 삐뚤어지긴 했으나 또박또박 쓰여진 글씨들이 막내 녀석의 숙제에 대한 강한의지를 보이는 듯해 빙그레 미소가 오르기도 했다.

"여기 적힌 네 가지만 지키면되는거야? 별로 어렵지 않겠네. 같이 하지뭐"

나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을 해 줬다. 숙제가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게다가 다 저녁에 내민 숙제이니 하루가 그리 많이 남은 시간으로 여겨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이 숙제는 내일이랑 모레 주말동안 하는거 라고요"

녀석의이말 한마디가 왠지 찜찜한 느낌을 가져다 줬다. 예상대로였다.

노는 토요일 오전 아침에 눈을 뜨고 칫솔을 잡는 순간 "엄마 칫솔 손잡이가 플라스틱이라서 오늘은 쓰면 안돼요" 언제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막내의 경고가 시작됐다. "그런게 어딨어? 그래도 이빨은 닦아야지. 그럼 이도 안 닦고 살란 말야?" "소금이랑 같이해서 손으로 닦으세요" 순간 '욱'하는 마음과 무슨 숙제가 그러냐고 윽박을 지르고 싶었으나 참고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일이 여기서 끝날리가 없었다. 양치 컵도 플라스틱이라 쓰면 안 된다고 하고, 샴푸도 린스도 플라스틱 용기에 담겼다고 사용금지를 요구하며 비누를 건네는가 하면, 아침 식탁의 반찬통이 플라스틱이라며 끝끝내 사기 접시에 찬을 담아주기를 고집하는 녀석에게 시달리는 일들이 계속 됐다. 오후가 채 끝나기도 전에 결국 나는 항복을 했다. "도무지 않되겠어. 엄마는 포기할래. 이것 보렴. 물도 다 떨어져가고 있는데 자기 전에 샤워는 둘째 치고라도, 저녁 밥은 어떻게 하고 설거지는 어떻게 하겠니?"

엄마와 함께 숙제를 완성하지 못해 시무룩한 녀석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없는터라 그저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쓰레기 봉지를 버리러 가면서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그 속에 비닐들이 얼마나 많던지 새로웠다. 아마도 나 역시 비닐이나 플라스틱없이 하루를 넘기기 힘들만큼 그것들에 익숙해져 있다는 게 놀랍기까지 했다. 텔레비전이며 에어컨을 켜고 끄던 리모콘도, 컴퓨터 키보드도, 화장품 용기도, 볼펜도, 물병도 모두가 그랬구나. 과자봉지 속의 또 다른 비닐봉지들을 보며 씁슬한 미소가 흘러내렸다.

문 앞까지 끙끙거리며 수박을 들고 오는 아이에게 왜 수박들 수 있는 줄을 이용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니,"그것도 비닐이라고요. 엄마는 숙제하는거 항복이지만 저는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요"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수건으로 훔치면서 대답하는 녀석의 오물거리는 입술이 오늘은 왜 그리도 이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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