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국 세광중 교사·문학평론가

[교육의 눈] 김재국 세광중 교사·문학평론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던 코로나19의 위세가 한풀 꺾인 지난 연휴에 노모를 뵈러 고향길에 올랐다. 먼 산의 철쭉이 꽃 사태를 이루고 연두색이 온 세상을 경이롭게 밝히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경이로움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노모와 살고 있는 동생 내외가 차린 저녁 밥상은 그동안 적조했던 시간을 채우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제수씨의 재난지원금에 관한 성토로 식사는 마냥 즐거울 수는 없었다. 제수씨는 노모의 의료보험이 필자에게 올라 있기 때문에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연일 언론에서는 모든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한다고 보도를 하고 있던 터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수씨는 면사무소까지 방문했지만, 재난지원금 신청 대상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만 들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했던가. 필자는 재난지원금을 주라는 말도 주지 말라는 말을 한 적 없고, 받거나 받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을 한 적도 없다. 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 필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는 현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불현듯 며칠 전에 보았던 모 일간지의 글이 생각났다. 재난지원금이 취지와 다르게 코로나19로 생계 곤란을 받고 있는 취약계층에게 시급하게 지급되지도 않고, 부족한 재원을 국민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내용이다. 그 말인즉슨 결정은 정부가 해놓고 자발적 기부라는 명목으로 국민의 도덕적 양심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발성을 빙자한 강제적 기부를 할 것이 아니라 ‘기부는 내 선택, 내 이름으로 해야 한다.’라는 것이 결론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도덕적 양심과 품격을 시험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코로나19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원격 수업을 준비로 노심초사하고 있는 교단에도 재난지원금은 새로운 갈등을 유발한다. 재난지원금을 신청하는 교사, 신청하지 않는 교사 사이에 이질적 거리감이 생긴다. 재난지원금을 신청하지 않는 교사는 도덕적이고, 신청하는 교사는 비도덕적 부류의 인간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전체주의 정권을 자라게 할 자양분이 될 위험”이 있으며, “코로나가 무서우니 지금까지 지켜온 원칙은 일단 다 접어두어도 되고, 정부가 무엇을 해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가 전체주의의 문을 열 수 있음을 명심”하라고 경고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말보다 위험한 생각은 없다. 개인의 품격은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을 때 완성될 수 있다. 국가가 개인의 도덕성을 강제하거나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개개인의 자유가 없는 민주주의보다 더 처참한 것은 보지 못했다.”라는 명언을 남긴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의 말로 이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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