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살며생각하며] 황혜영 서원대 교수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2016)에서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할 수 없는 각 나라 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 우루두어 ‘나스’가 있다. 나스는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는 것을 알기에 느끼는 긍지나 자신감’을 뜻하는데, ‘긍지나 자신감’의 표면적 뜻은 번역할 수 있겠지만, 내가 잘해서 혹은 당연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조건 없이 사랑받음을 알 때 느끼게 되는 자신감이라는 뉘앙스는 번역하기 어려울 것이다.

책에 우리말도 나오는데, ‘눈치’라는 단어다. 왜 ‘눈치’일까 좀 의아했지만,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이의 기분을 잘 알아채는 미묘한 기술’이라는 설명을 보니, 한편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일이 있어 친구를 만나 신나게 자랑을 하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다가오는 친구의 어깨가 축 처져 있을 때 내 기분 그대로 표현하기보다 표정을 좀 고르고 친구의 마음을 헤아려 대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친구의 ‘눈치’를 보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눈치에는 상대방의 기분을 살펴 대해주는 우리문화 고유의 정서적인 민감함과 섬세한 배려가 담겨 있다.

번역할 수 없는 우리말 중에 또 뭐가 있을까 떠올려보니 맨 먼저 ‘고즈넉하다’가 떠오른다. ‘한적하고 아늑하다’라는 뜻도 뜻이지만 인적이 드문 고요한 산사에서 느껴질 듯한 분위기도 번역하기 어려울 것 같다. 과연 ‘고즈넉하다’에서 풍기는 감성과 분위기는 단어의 뜻에서 오는 것일까, 소리나 감각에서 오는 것일까?

‘시원하다’와 같이 다양한 뉘앙스를 지닌 말도 번역하기 어려운 우리말 중 하나일 것 같다. 덥거나 춥지 않고 알맞게 서늘하다는 의미는 번역하기가 괜찮다. 하지만 우리는 이럴 때만 시원하다고 하지 않는다. 음식이 차고 산뜻할 때나, 뜨거우면서 속을 후련하게 해줄 때처럼 정반대의 경우에 모두 시원하다고 한다. 막힌 데가 없이 활짝 트였을 때도 시원하다고 하고, 잘 안 되던 일들이 해결되었을 때에도 시원하다고 말한다. 시원하다는 또 한국 고유한 미적 개념이기도 한다.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번역할 수 없는 우리말로 전혀 다른 말들을 제안할지도 모르겠다. 댕댕이, 삼귀다, 졌잘싸, 엄근진, 이런 말들 말이다. 최근 들어 심심찮게 들리는 ‘댕댕이’는 멍멍이의 글자 모양과 유사하게 바꾼 신조어란다. ‘삼귀다’는 사귀다의 ‘사’와 발음이 같은 숫자 4로 간주하고 4 바로 앞 숫자 3으로 바꾸어 사귀기 전 단계, 소위 썸타는 단계를 뜻한다. ‘엄근진’이나 ‘졌잘싸’는 단어의 첫 글자들만 결합한 축약어다.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다의 축약어 ‘엄근진’은 왠지 무겁고 부담스러울 성격을 축약어로 표현하여 약간은 가볍고 코믹하게 희화하여 도리어 친근하게 느껴지게 해준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뜻의 ‘졌잘싸’ 축약어의 유머에도 따뜻한 격려와 위로, 인간적 배려가 깃들어 있다.

기존 문법을 파괴하고 살짝 비트는 이들 신조어나 축약어를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인공지능이 삶의 전 영역에서 인간을 대체해가는 오늘날,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을 인간 영역은 무엇일지 질문을 던질 때, 창조적 상상력으로 언어의 무한한 잠재성을 일깨우는 난센스가 인공지능이 전적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인간 고유한 영역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