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5장 6월의 동화

▲ <삽화=류상영>

순배영감의 밭고랑처럼 주름이 진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다. 짠 소금이라도 먹는 것처럼 입술을 냠냠 거리며 표주박으로 막걸리를 서너 수저는 될 정도로 살짝 떴다. 두어 모금 꿀꺽꿀꺽 마시 후에 손바닥으로 입술을 쓰윽 닫고 넉넉한 표정으로 모내기판을 바라본다.

놉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어깨에 어깨를 마주대고 모를 심는 뒤로 박태수와 윤길동이 소를 몰고 있다. 모쟁이 노릇을 하는 아낙네 세 명이 모판과 논을 부지런히 오가며 못단을 옮겨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뒷모쟁이를 하는 아낙네들은 모쟁이들이 던져 놓은 못단을 모내는 사람들 뒤로 옮겨주고 있다. 넓은 논 구석에는왜가리 두 마리가 한가롭게 개구리를 잡아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너나 할 거 읎이 죄다 정신읎이 모를 내는구먼. 저 인원이믄 해전에 충분히 끝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말여."

기분이 넉넉해진 순배영감이 손가락으로 왼쪽 무릎을 툭툭 치며 한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그냥 바라볼 때는 모를 내는 것츠름 뵈지만 소리읎는 전쟁유. 전쟁."

"전쟁 끝나고 휴전을 한 지가 삼 년이나 지났는데 모를 내다 말고 먼 전쟁을 한다는 거여."

"아! 면장님이 올게만 농사를 짓고 내년 봄 부텀은 논을 내 놓겠다는 소문 못 들었남유?"

"작년에는 안 그랬남? 재작년에도 그란 거 같고, 그 앞 전해에도 모내기를 앞두고 논을 내 놓겠다고 했던 거 같던데."

"이번에는 진짜래유. 그랑께 사람들이 면장님한테 잘 보일라고 오줌 눟고 뭐 볼 새도 읎이 모를 내는 거 아니겠슈."

변쌍출은 바가지에 있는 막걸리를 표주박을 떠 마시고 면장댁을 바라본다. 너럭바위에 앉아서는 이병호의 사랑방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병호는 사랑방 앞 누마루에 앉아서 맨 입에 소금을 씹는 얼굴로 모를 심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몇 시까지 모를 심는지 시간을 재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모를 내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먹고 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나이가 든 것이 서럽기도 했다. 자신도 오씨 정도의 나이만 돼도 멀거니 앉아서 구경만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사람 사는 기 모두 전쟁이지 머. 저! 저……해룡이 좀 보라지. 논에서 아주 뫽을 감는구먼. 뫽을 감아."

논에서 뒷모쟁이를 해 준다며 못단을 나르던 해룡이 엎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순배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안타까워했다.

"우리 동리서 해룡이 팔자가 개 팔자유. 저런 팔자가 되기도 심들겨. 보릿고개에 끼니 걱정을 하나, 가뭄이 든다고 물 걱정을 하나, 태풍이 온다고 나락 엎어질 걱정을 하나, 있으믄 먹고, 없으믄 안 먹고. 개는 공짜 밥 먹는 대신 밤 잠 안자고 집이나 지키지, 해룡이는 집을 지킬 필요도 읎응께 개팔자 중에서도 상팔자여. 안 그래유?"

"암만, 이 동리서 이병호 그 냥반 팔자가 상팔자라고 하지만 해룡이 팔자 쫓아갈라믄 석달열흘 동안 밤잠을 안자고 쫓아가도 못 쫓아갈겨."

"형님이 이왕지사 말을 끄냈응께 하는 말이지만 이병호 그 냥반 팔자 핀지 을매나 됐슈? 해룡이 나이가 올게 스물다섯 살이잖유. 해룡이는 지 어미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상팔자가 됐응께 에누리 없는 이십오 년 동안 상팔자로 살았잖유. 헌데 그 냥반은 을매나 됐슈?"

"그라고 봉께 제우 십년 넘었구먼."

"지 말이 바로 그 말유. 지가 형님보다 많은 세월을 살지는 않았지만 말유. 조상을 잘못만나서 재산도 읎고, 배운 것도 읎지만. 그려서 내 평생 남위에 올라서지 못하고 늘상 남 밑에서 농사를 짐서 시방까지 살아 왔지만 말유. 내 배 채울라고 다른 사람 피눈물 흘리게 살아오지는 않았슈. 하지만 저 위에 사는 냥반은 우리 같은 놈 피눈물 흘리는 걸 아주 예사로 보는 거 가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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