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5장 6월의 동화
| ▲ <삽화=류상영> |
변쌍출은 목이 마른 얼굴로 표주박 가득 막걸리를 뜬다. 갈증 들린 사람처럼 벌컥벌컥 마시고 난 후에 다시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순배영감이 말을 막았다.
"지도 그런 소문은 들었슈. 그래서 해방 한해 전인가, 두 해전인가 마름을 오씨로 갈아 치울라고 한다는 소문도 들었슈. 그라고 동리서 둥구나무에서 지사 지낼라고 비봉산 기슭에 숨겨 둔 쌀 두가마니를 일본순사들이 찾아 낸 것도 이복만 그 냥반이 주재소에 찔렀다는 소문도 파다 했잖유."
"그려. 그때 일본순사하고 면서기들이 헛간이며 나무둥거리, 뒷간에 붝 아궁이 까지 싹 뒤지는 판이라서 집구석에는 쌀을 숨겨 놓을 장소가 읎었지. 그려서 동리사람들 하고 고사 지낼 쌀만큼은 뺏기믄 안된다고 상의를 해서 비봉산에 숨겼었지."
땡볕이 내려쬐고 있지만 바람은 서늘했다. 순배영감은 주름투성이인 얼굴로 면장댁을 올려다본다. 굳게 닫혀 있는 솟을대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뒤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비봉산을 희한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린다.
"그 때 먹고 사는 것도 큰 문제지만 둥구나무에 고사를 한해라도 거르믄 더 큰일이 생긴다고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잖유."
"결국 쌀이 읎어서 일본 놈들한테 배급받은 만주산 조밥을 지어서 고사를 지낼 수 벢에 읎었지. 그런 걸 보믄 하늘이 영 무심하지는 않은 가텨. 그릏게 몹쓸 짓을 했응께 육이오 때 그 변을 당했지. 만약 육이오 때 그 변을 당하지 않았다믄 시방쯤 국회의원이 됐을지도 모를껴. 해방이 되고 나서 노상 내 자식은 면장이지만 난 국회의원이 되고 말꺼라고 큰소리 치고 댕겼응께."
순배영감은 비명에 간 자식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먼 들판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모르쥬. 시방 저 세상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지."
변쌍출도 순배영감의 시선을 따라서 비봉산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는 비봉산은 이병호 소유의 산자락을 제외하고는 키가 일 미터도 되지 않은 잔송들 뿐이다.
이병호의 집 마당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고소한 냄새가 몰려 다녔다. 하지만 마당은 수탉이 졸고 앉아 있을 정도로 조용했다. 절간처럼 조용한 마당과 다르게 정지 안에는 몇몇의 아낙네들이 부대껴 가면서 애호박을 잘라 전을 붙인다, 아침 일찍 학산에서 떠 온 국거리용 돼지고기를 썬다, 멸치를 볶고 콩을 볶는다, 무를 토막 쳐서 고등어조림을 만든다, 우물가에서는 나물을 씻고 쌀을 씻느라 부산을 떨었다.
"먹다가 남으믄 또로 갖고 올라오믄 되지만, 모지라믄 안되니께 넉넉하게 볶아유. 찬지름 애낄라고 나물을 짜게 묻히믄 물이 켜서 물마시러 들락거리다가 볼일 다 보믄 외려 손해유. 그랑께 찬지름도 애끼지 말고 양대로 써유."
옥천댁은 해산을 며칠 앞두고 있었지만 일 년 농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모심는 날이라서 쉴 수가 없었다. 보은댁이 몇 번이나 방에 들어가서 누워있으라고 권유를 했지만 정지와 우물을 오가며 이것저것 지시를 했다.
정지에서는 지지고 볶고 삶느라 유월의 바람이 무덥기만 하지만 사랑방 앞 누마루는 한적하게 시원한 바람만 불고 있었다.
누마루에는 이병호가 개다리소반을 사이에 두고 보은댁과 앉아 있었다.
개다리소반에는 편육과 애호박전에 깨강정이 간단하게 차려져 있었다. 자기로 된 종지 술잔에는 막걸리가 아닌 맑은 청주가 담겨있었다. 젓가락도 놉들이 사용하는 놋젓가락이 아니고 무늬가 있는 은제젓가락이다.
"올게 논을 내 놓는다고 해 놓고 또 안 내놓으믄 사람들이 욕을 바가지로 할 건데……"
보은댁 앞에는 술잔이 없었다. 이병호 앞에서 술을 따라주며 말동무를 하고 있는 보은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