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오병익칼럼] 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코로나에 잘린 방학 / 애걔걔, 한 뼘! / 마스크로 꾸욱 입을 닫고서 / ‘안 돼, 안 돼’ / 그게 무슨 방학? / 필자의 동시 ‘한 뼘 방학’ 둘째 연이다. 생각할수록 아이들은 억울하다. 재보고 또 재봤자 모자라는 방학에 촉각이 곤두섰다. 그러잖아도 100일 넘는 ‘바깥 출입금지령’ 으로 ‘방학 포만감’마저 꺼져버린 서운함, 나쁜 코로나를 어쩔까.

초등학교 3학년짜리 손주에게 학교가 좋은 이유를 물었다. 방학을 소리친 뒤 식식거렸다. 1,2학년 때와 달리 너무 짧다는 항변이 깔렸다. 코로나 상황 악화를 들이댔지만 닭똥 같은 눈물 공세에 밀려 통산 전적 ‘백전백패’로 끝났다. 그러니 ‘할아버지 수염은 손주가 주인’ 틀림없다. 무조건 다그쳐 아이를 꺾으려드는 엄마 욕심, 오로지 점수 때문이다. 18÷2=9를 맞힌 아이가 2×9와 9×2도 끙끙거릴 경우 기본 곱셈은 긴가민가한 채 나누기 답을 낸 아이러니다. 100점 닦달에 달달 외운 줄 모르고 만족하는 고장 난 부모, 결코 새삼스럽지 않다. 짧은 시간 친구들과 어울리려 해도 적합·부적합 선별로 숨통이 막힐 정도다. '자기주도 생활'을 귀 따갑게 운운하면서 여전히 원격 조정 채찍질 아닌가. 간섭에서 풀려나 자유로울 권리, 익숙한 탈출의 투자다.

문제는 뉴 노멀(New Normal)이다. 표준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기준부터 바꿔야 방학은 쏠쏠한 재미를 늘린다.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넘어서는 시대다. 이세돌 프로9단의 벽을 넘어 교육·의학·금융·법률 등 전문분야까지 초월적 비대면 IT 쾌속으로 질주하는 세상 환기(換氣)에 방학을 추월할 마중물은 없다. 그러나 “사슴벌레가 공부시켜주나, 당장 갖다버려" 무슨 훈련병처럼 몰아붙인다. 고정관념이 '뻥' 뚫리지 않으니 진짜 공부를 놓치는 꼴이다. 아이를 찬란하게 키울 상위 개념, 무릎을 탁치며 순간 내뱉을 ‘아하!’ 경험, 결코 허툰 유레카(Eureka)효과가 아니다. 그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과 독창적 패턴 ‘실패를 성장의 출발’로 존중해 줘야한다. ‘와 신기하다. 혹시 내 의견을 말해도 괜찮겠니?’ 새끼와 함께 웃을 일이 많으면 그만큼 행복한 어미다.

초등학교 방학, 어머니께서 손수 담근 농주(農酒)를 들고 다랑이 논두렁길로 달렸다. 그럴 적마다 아버지는 풀숲을 가리키며 베짱이한테 배울 점을 물으셨다. 고루한 잣대인 ‘노래만 좋아 하하는 곤충’으로 부정할 때마다 ‘베짱이들 억울해 하지 않을까’ 물음표를 던지셨다. 6학년 여름이 끝날 무렵 ‘베짱인 뛰어난 표현력 그리고 세상 모든 건 쓸모가 다름’에 비틀거리던 우화, 오래 숙성된 ‘부자유친(父子有親)’ 명화다. 그렇듯 방학은 삶의 아우라(aura)를 키운다. 코로나 발 진동, 이제 시작 단계란 얘기다. 바라건대 부모먼저 고질적 면역 망을 터야할 텐데 베짱이 노래가 그립다. 얘들아, 방학을 얼마큼 늘리면 부모님 잔소리 쯤 볼우물로 채울 수 있겠니?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