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창이란 악기를 연주하면서 판소리의 한대목이나 민요 또는 단가를 노래하는 형태를 말하는데, 병창에는 가야금병창과 거문고병창이 있다.

산조란 남도 향토가락에 바탕을 둔 시나위와 판소리의 선율적 특성을 가진 독주곡 형식으로 가야금산조, 거문고산조, 대금산조, 해금산조, 아쟁산조, 피리산조 등이 있다.

충청북도는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충주의 우륵선생(신라 진흥왕 가야금의 명인)과 영동의 난계 박연선생(조선조 음악의 대가) 두 분을 낳은 고장이다.

또한 조선말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이며, 가야금병창의 창시자이자 충청제(忠淸制)가야금 산조의 창시자로 우리나라 음악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국악계의 거성이신 박팔괘 선생의 고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팔괘 선생에 대해서 아는 충북도민이 그리 많지 않아 안타까운 심정으로 필자는 충북국악협회의 자료와 여러 논문을 토대로 박팔괘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한다.

박팔괘 선생(1876~1946)은 고종 17년에 청원군 북이면 석성리에서 부유한 가정의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선생의 부친은 아들이 오래 건강하게 살라는 뜻으로 천하게 키운다며 7세부터 선생을 두고 가야금을 가르친 것이 결과적으로 그를 당대 최고의 가야금 명인으로 만들었다.

선생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고종황제의 부름을 받아 어전공연으로 가야금을 연주한 후 부터였다. 선생이 어전에서 연주할 때 가야금 12줄 중에서 4줄이 끊어졌으나 8줄로 연주를 훌륭하게 마치자 황제가 감탄하여 '네 이름을 팔괘라고 하거라'고 명하여 박학래(朴學來)라는 본명 대신에 하사 받은 팔괘(八卦)라는 이름을 썼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박팔괘 선생에 의해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가야금병창이 처음으로 창시되었다. 가야금 병창은 오태석(1895~1953)에 의해 유성기 음반으로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었으며, 전남 영양 출신의 김창조에서 비롯된 가야금 산조의 틀과는 전혀 다른 충청제 가야금 산조가락이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조선말 최고의 명창이었던 김창환, 이동백, 한인호 송만갑과 함께 공연을 했다.

또한 1915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선생의 가야금 병창이 미국의 빅타 라는 음반회사에서 녹음되었는데, 그 음반(victer 42983-ab)에는 '백구타령'과 '새타령' 등이 수록돼 있다.

그 후 선생은 서울생활 16년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접고 낙향하여 지동근, 백점봉, 정해시 등과 공연활동을 계속 하였고, 후학양성에도 주력하여 박상근, 이일선, 이창수, 이계선, 박채봉, 박상근, 성금연 등의 제자를 길러 오늘날 가야금병창의 박상근流, 성금연流의 원류(源流)로서 박팔괘의 음악이 전해지고 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71세의 나이로 쓸쓸히 타계한 선생의 묘소는 청주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청원군 북이면 장양리 산 108번지에 있는데 명성에 비해 묘소는 초라하다. 상석에는 伽倻琴散調及竝唱之名人通情大夫密陽朴公八卦之墓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명인 통정대부 밀양박공 팔괘의 묘) 라는 글귀가 박팔괘 선생의 묘소임을 나타내고 있다.

충북예총의 충북국악협회에서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기념사업으로 올해 3회째 추모음악회와 제16회 전국학생국악대제전을 열고 있다.

앞으로 우리 도에서는 국악계의 거성인 박팔괘선생의 기념관 건립과 묘역의 성역화 등을 통하여 가야금 병창의 발상지로서의 위상을 높여야 할 것이다.

▲ 문상옥
청주예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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