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6장 접시꽃이 피어 있는 풍경

▲ <삽화=류상영>

"머여! 또 이북 놈들이 쳐들어오기라도 했남? 아니믄 대낮부텀 언 놈이 질바닥에서 히야까시라도 하드냐?"

"모, 모산 큰 마님이 애기를 뱄대유?"

"모산 큰 마님이라니?"

한참 만에 거친 숨을 조절한 춘임이가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스……승철이 어머가 임신을 했다니께유."

"승철이 어머라믄? 옥천댁, 아니 모산 형님이 임신을 했단 말여?"

"그……그렇다니깨유."

"너, 즘심 때 뭘 잘못 먹었냐? 님을 봐야 뽕을 따고, 씨를 뿌려야 열매를 맺지. 딴 사람이 아를 뱄다는 말을 잘못 들었겄지. 그랑께 헛소리 그만 하고 어여 가서 장이나 바와. 오늘 부면장님 오신다고 했응께 매운탕 끓일 조기도 한 마리 사 오고."

들레는 춘임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동하의 말에 의하면 옥천댁한테는 도무지 정욕이 동하지 않아서 별 재미를 못 느낀다고 했었다. 재미를 못 느낀다면 합궁을 안했을 수도 있었다. 씨도 없는 상황에서 옥천댁이 임신을 했다고 호들갑을 떠니 혼란스럽기만 했다.

"참말이어유. 딴 사람도 아니고 그 머셔. 둥구나무거리에 사는 그 늬여. 상규네한테 지 요 귀로 직접 들었단말여유."

"그럴 리가 없어. 먼가 잘못 들었을껴. 그랑께 어여 장이나 바와. 어여!"

"알았슈. 난 사모님이 걱정이 돼서 다 큰 츠녀가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쪼차 왔는디……"

들레는 뒤로 나자빠질 정도로 놀랄 줄 알았던 들례가 너무 차분하게 대하니까 맥이 빠지는 것 같았다.

"야 좀 봐라. 너 내 말이 말 같지 않는 거여? 어여 가서 열무거리 사오지 않을껴? 싱싱한거는 남들이 다 사가고, 삶아 놓은 나물처럼 물러 터진 거만 사올라고 작정한겨?"

들례가 다시 다그치자 춘임은 퉁퉁 부은 얼굴로 돌아섰다. 숨차게 뛰어 들어 올 때와 다르게 양철대문을 빠져나가는 긴 그림자가 한참이나 걸려 보일 정도로 느릿하게 밖으로 나갔다.

그럴 리가 읎어. 동리에 소문이 날 정도라믄 한 달은 지났을거잖여. 그런데도 부면장님은 임신을 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셨어. 그기 그짓말이라는 증거여. 하지만 춘임이가 상규네한테 들었다잖여. 상규네…….

춘임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들례는 저만치서 구경만 하고 있던 혼란스러움이 성큼 눈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백리 밖에서 석유를 사 오다가 방문 앞에서 석유 병을 깨트린 기분이 이럴까. 곰보딱지나 째보하고 서방질을 하다 쫓겨나도 이렇게 억울할까.

상규네라면 박태수의 아내를 말하는 것 같았다. 박태수의 아내라면 학산까지도 소문이 난 여자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오줌 마려운 것을 참는다는 것은 복부가 터져 나가는 듯한 고통 일 것이다. 그런데도 학산 장에서 십리 길을 걸어 집 뒷간에 도착해서 볼일을 보는 여자다. 삼일을 굶어도 장리쌀은 먹지 않고, 모산에서 유일하게 농협조합 돈을 쓰지 않는다는 여자가 박태수의 아내 상규네다. 상규네가 말을 했다면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얼른 믿어지지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상하게도 만약 옥천댁이 이번에 아이를 낳게 된다면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 같은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만약 아들일 낳게 되면 자신은 학산을 떠나서 어디론가 정처 없이 흘러가야 한다는 엄청난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일까. 임신을 했다면 아들을 낳고 말 것이라는 예감이 먹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었지만 애써 머리를 흔들었다.

그려, 춘임이하고 화토 칠 때도 풍치믄 풍 나오드라, 원래 딸 낳는 자궁도 따로 있다고 하드라. 그랑께 내리 딸만 셋씩이나 뽑아냈지. 이븐에도 틀림읎이 딸일껴. 이븐에도 딸을 낳는다믄 외려 잘 된 거 잖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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