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6장 접시꽃이 피어 있는 풍경

▲ <삽화=류상영>

정액제는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드는 것과 상관없이 무조건 마지기 당 벼 한 섬을 도조로 받쳐야 한다. 도조뿐만 아니라 지주가 부담을 해야 할 지세地稅, 수세水稅, 두세斗稅까지 소작인이 부담을 해야 하는 제도다. 만약 흉작을 하여 계약한 도조를 받치지 못하면 받치지 못한 분량은 고스란히 장리로 고리를 붙여서 내년 소출이 끝난 후에 받으면 되기 때문에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따라서 흉년 때는 정액제가 지주한테는 이익이 되지만 소작인들한테는 그 후유증이 몇 년, 상황에 따라서는 평생으로 이어질 정도로 피해가 크다.

들례는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기 위해 펌프질을 했다. 펌프질을 할 때마다 바라만 봐도 차가운 물이 펌프에서 콸콸 쏟아져 시원하게 대야를 채웠다.

담장 밖이야 바람이 불때마다 흙먼지가 풀풀 거리는 가뭄이 계속되고 있지만 마당에는 가뭄과 상관이 없었다. 정원에는 물을 흠뻑 뿌려서 조금 전에 비가 내렸던 것처럼 꽃잎이나 나뭇잎에는 물기가 축축했다.

가만……들례가 올해 몇 살이더라?

햇볕 한줌 빠져 나오지 못할 정도로 넝쿨이 무성한 등나무 그늘 밑은 딴세상처럼 시원했다. 대나무 흔들의자에 앉아서 부채질을 하고 있던 다나까의 눈에 들례의 뽀얀 장딴지가 사로잡힌다. 빨래를 하느라 치마로 하체를 휘감아 끌어 올린 모습이 더 이상 십대의 들례가 아니다. 구루무나 박화분 비녀나 빛 따위를 방물장수의 손에 끌려 식모로 들어오던 몇 년 전만해도 비쩍 마르고 볼품없던 십대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펑퍼짐한 엉덩이 하며 펌프질을 할 때마다 저고리 앞섬을 들썩거리는 젖가슴은 출렁거리다 못해 터져 나가 버릴 것처럼 농익었다. 무엇보다 펌프질을 할 때마다 들쑥들쑥 보이는 뽀얀 허리가 현기증을 일으킬 지경이다.

좋아!

아내는 조선인 유지 부인들의 모임단체인 애국금차회 활동을 독려하러 나간 중이라 집안은 절간처럼 조용했다. 다나까는 아랫도리가 뻐근해 지는 것을 느끼며 부채를 들고 일어섰다.

"들례야, 이리 들어오너라."

"예!"

들례는 빨래를 치대다 말고 다나까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섰다. 다나까가 야릇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린다. 자기를 따라서 들어오라는 손짓이다. 들례는 물 묻은 손을 치마에 문지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 와라."

들례는 다나까가 차를 끓여 오거나 잠이 들 때까지 부채질을 해 달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 다나까가 부엌 옆에 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대단한 잘못이 저질렀는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옷을 벗어 봐라."

다나가는 부채질을 하면서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예?"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서 옷을 벗어 보란 말이다."

"지는 훔친 것이 암 것도 읎슈."

들례는 다나까의 말이 얼른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잘못하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을 가렸다. 여기서 쫓겨나면 또 다시 거리의 떠돌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리의 힘이 쭉 빠져 나가서 덜썩 주저앉으며 무릎을 꿇었다. 주인이 추궁을 할 때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 방물장수가 몇 번이나 주의를 줬던 말이 떠올라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손을 싹싹 빌었다.

"허! 왜 이리 말을 못 알아들을까. 옷을 벗으라고 했지 않느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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