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에 쏟은 선인들의 정성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그리고 무분별한 개발과 온난화 등으로 지구촌이 신음하고 있다는 소식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이처럼 신음하고 있는 지구를 살리자며 범정부적으로, 초국가 차원의 정책 개발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저탄소 녹색성장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으니 그 중요성은 말해 무엇 하랴.

32평짜리 우리 집 아파트에는 에어컨이 없다. 젊은 날, 고시원에서 밤 새 틀어 놓은 에어컨 바람에 냉방병 걸려 생고생 한 이후로는 에어컨 바람을 피해 다닌 것도 이유였지만 자연의 바람보다 더 좋은 휴식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손수건과 부채, 그리고 싱그러운 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몸을 단정하게 하며 환경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상품 판촉용으로 쏟아지는 1회용 티슈를 사용하지 않고 손수건을 챙기는 일,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힐 때는 접선이든 단선이든 개성에 맞는 부채로 바람질을 하는 일, 그래도 상쾌하지 않을 때는 잠시 일상의 누더기를 접고 가까운 공원이나 나무 밑 그늘에서 싱그러운 대자연과 속삭이는 일, 이것들은 모두 자신의 삶이 곧 문화요 멋이요 자연이며 그린스타일의 실천이라 할 것이다.

청주시한국공예관에서는 최근 작열하는 태양, 눅눅하고 번잡한 여름을 지혜롭게 보내고 문화의 바다에 풍덩 빠져볼 수 있는 이색 전시를 열었다. 섬유예술가와 한지작가가 부채의 미학적 가치를 새로운 시선으로 풀어 주는 <부채특별전_바람, 삶에 스미다> 테마전을 개최한 것이다.

22명의 섬유 및 한지작가가 참여했는데 작품 모두 흥미롭다. 부채라는 전통적 가치에서 소스를 얻었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물론 작품이 주는 메시지 또한 역동적이며 각양각색이다. 우주공간을 표현한 듯, 망망대해의 돛단배를 형상화 한 듯, 대자연의 사계를 담아낸 듯하다. 어떤 작품은 빛과 어둠사이로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자연과 햇살이 속사이며 내밀함을 보일 듯 말 듯 신비스럽다. 부채이기고 하고 설치미술이기도 하며, 조형적이기도 하고 실용적이기도 하다. 삶이기도 하고 예술이기도 하며 바람의 화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싶다.

이와 함께 예술가들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영감을 기법의 다양함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하이테크와 하이터치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작품화 했다. 순백의 한지를 다채로운 형식으로 요리하고 옻칠을 통해 은은한 향과 멋스러움을 더했으며 한지를 겹치고 물에 불린 뒤 두드려 만든 줌치기법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숨김과 드러남, 시간과 공간, 삶과 문화, 과학과 철학, 과거와 현대, 자연과 문명의 비욘드(beyond)가 예술로 새 옷을 입은 것이다.

옛 사람들의 지혜와 예술혼, 그리고 곱디고운 정성도 만날 수 있다. 한 자루의 합죽선을 만드는 데 드는 대나무의 양은 약 한 다발. 옛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자리에서 꼼짝 않고 댓살을 깎고 부채꼴을 만들며 마디를 붙이고 종이를 바른 뒤 그림을 그리는 등 200여 공정을 거쳐야만 합죽선이 탄생됐다. 혼 담아 예술로, 마음 담아 생활로 부채에 쏟은 선인들의 정성이 범상치 않다. 한 여름 더위를 눈으로 날려버리기 위해 애쓴 실용미술과 공예회화를 한눈에 읽을 수 있다.

한지가 갖는 과학의 우수성과 쓰임으로서의 미학, 그리고 예술로 새롭게 날고 있는 모습도 함께 엿볼 수 있다. 닥나무 껍질을 베고, 찌고, 담그고, 짜고, 말리는 등 99번의 과정을 거쳐 100번째 장인의 손에 나온다는 한지. 이 까다로운 과정을 거쳤기에 1000년이 지나도 질기고 부드러운 한지는 우리 역사와 함께 살아온 숨쉬는 종이라 할 것이다.

우리 조상들에게 부채는 느림의 미학이자 한지의 과학이었으며, 바람의 여유이자 삶의 지혜였으며, 소통의 공간이자 예술의 극치였다. 부채만으로도 문화와 가풍을 엿보고 철학과 미술을 즐기며 시간과 공간, 사랑과 우정,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초월한 상상의 보고였다. 그러니 부채와 함께 가볍고 우아하게, 아름답고 앙증맞게, 멋스럽고 절제하며 살아야겠다.

▲ 변광섭
청주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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