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체험'

수건으로 눈을 가렸다.

일시에 모든 빛이 사라졌다. 파트너의 손을 부여잡고 나는 허공을 디디듯 앞으로 나아갔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몸의 접촉만으로 눈을 가린자를 안전하게 안내하는 것이다. 내 파트너는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체격도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성품도 아주 좋다. 그 뿐 만 아니라 지혜로운 리더십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내가 그녀를 믿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다.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녀의 몸짓언어를 이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불안하긴 했지만 특별한 위험이 존재하는 코스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는 행사이기에 주최 측에서도 무리한 코스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몇 분간의 경험을 즐기리라 생각했다.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 후각으로 그곳이 실외라는 걸 알았다. 발바닥의 감촉이 뭉쿨해지자 발가락이 오므라들듯 긴장했다. 발바닥을 땅에 대고 디디며 밀고 나아갔다. 오르막 계단이 나오자 오히려 편안해졌다. 경험을 떠올려 계단의 높이를 가늠하고 한 단계씩 천천히 올랐다. 다시 평지가 나오자 발바닥을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파트너의 팔목을 거뭐지고 게임이 끝날 때까지 시각과 청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동원했다.

다음날 아침, 심하게 달리기를 한 것처럼 종아리가 아팠다. 오른쪽 팔도 뻐근했다. 내가 그토록 긴장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냥 마음 편하게 파트너에게 의지 하려고 했었는데 내 무의식은 긴장했었나보다. '편안하게 안내 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얘기 한 것이 가식이란 말인가? 며칠 동안긴장했던 근육이 앓는 소리를 냈다. 단 몇 분간의 암흑 체험으로 나는 내 신체의 안녕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절감했다.

며칠 전에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에 농사짓는 시각장애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암흑체험을 하고 곤욕을 치룬 터라 흥미 있게 그 프로를 보았다.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는데 영락없이 붉은 고추만을 따시는 것이었다. 비결을 묻자 풋고추는 감촉이 딱딱하고 붉은 고추는 다 익어서 부드럽단다. 시멘트바닥과 흙바닥을 구분하던 발바닥의 감촉이 떠올랐다. 고추밭에서 집까지 멀지않은 거리를 태연하게 걸어서 돌아온 아주머니는 밀가루를 계량해서 손국수를 했다. 홍두께로 고르게 밀반죽을 하고 능숙한 칼솜씨로 칼국수를 만들어 냈다. 옥수수 대를 작두에 썰어 소여물을 주고 방 청소를 했다. 그 분을 수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분이 누군가를 수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못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몸 성한 이들보다 더 나았다. vj가 '어떻게 그렇게 눈이 보이지 않는대도 잘 하시냐'고 묻자 '이런 일들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는 아주머니 말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사람의 에너지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관이 눈이라 한다. 몹시 지쳐있을 때 가만히 눈 감고 몇 분만 기다려도 저절로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눈을 감으면 후각과 청각과 촉각이 곤두선다. 핸드백 속에 손을 집어넣고 물건을 찾는 일이 눈으로 보는 일 못지않다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굳이 무엇인가를 보지 않아도 된다면 그저 편안하게 눈을 감고 에너지를 모은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를 잡기 위해 눈을 감듯 사랑의 순간에도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때때로 눈을 감고 편안한 마음이 되어보고 싶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는, 그래서 스트레스에 경직된 몸을 풀어내고 싶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편안한 마음이 좋다.

▲ 유인순
천안수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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