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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현장을 찾아(16) - 공주편
채길순  |  news@ccdail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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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06.25  20: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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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의 분수령 된 공주성 전투

공주 성 전투 에 대한 역사적 의의는 이미 잘 알려졌다. 일찍이 공주 성 전투 상황도 일본군과 관 기록을 토대로 비교적 상세하게 접근되었고, 공주 우금치에는 위령탑 이 세워졌다. 그러나 공주 지역에서 활약한 김지택(金知澤), 장준환(張俊煥), 배성천(裵成天), 설장률(薛長律)등의 지도자에 대한 행적이나 공주 취회에관한 탐구는 미흡한 편이다.

● 공주 접중에서 동경대전 간행
1881년 무렵에 충청도 동학지도자들이 단양에서 피신하고 있던 2세 교주 최시형을 찾아오는데, 공주 윤상오(尹相五)가 끼어있었다. 이로 미루어 공주 지역에 동학은 일찌감치 유입된 듯하다.뿐만 아니라 1883년 공주 접중에서 동경대전(癸未仲夏版)이간행될 정도로 교세가 막강했다.또, 동학혁명 초기에는 공주 달동 장준환 접주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초기부터 공주 목 관할에 목동 정안 요랑 이인등지에 집강소가 설치되기도 했다.역사는 동학혁명군이 공주 성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고보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들은 초기부터 공주 감영을차지하려는 맹렬한 활동을 보였다.하고개 사건에서 나타나는 장꾼은 바로 이곳 동학교도였고,집강소 간에 일어난 의미 있는 사건이다.또한 공주전투 때 이유상 같은 이 지역 출신 지도자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최초 민중 집회인 공주취회 장소나 주도한 인물에 대한 탐구도 필요하다.논산 소토산에 지휘소를 둔 충청 호남 동학연합군은 두 부대로 나뉘어 공주 진격을 개시했다. 전봉준 부대는 논산 초포에서노성과 경천점을 거쳐 공주 동쪽을, 손병희의 부대는 이인을 거쳐 공주 서쪽을 진격했다.이와 동시에 동북쪽 한다리에 옥천 동학혁명군이 진을 쳐서호응하고, 북서쪽 유구에서는 최한규 부대가 진을 쳤다. 바야흐로 공주를 포위 공격하는 형세를 갖추고 있었다.동학 혁명군의 공주 성 공략이 동학혁명 성패의 갈림길이었고, 관군이나 일본군으로서도 서울이 위협 받는다는 인식으로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 우와리 앞산서 1차 효포 능치싸움
노성에서 월암리 봉명리 능치(널치=웅치)를 지나 우와리 앞산은 당시 치열했던 전쟁터다.당시 일본군 모리오 대위의 기록에 따르면 능치 성화산 소학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높은 봉우리 20 리에 걸쳐 동학군의 깃발과 횃불이 밤낮없이 내걸려 공주성을 압박 했다.그 산 너머에 판판한 대가 있는데, 당시 동학 혁명군의 지휘소였다고 한다.이곳을 지나 화은리(가마울) 갈미봉에 이르렀다. 오른쪽으로우금치와 왼쪽 능치 두 갈래로 갈라지는 산이어서 갈미봉인데,이 마을은 온통 싸움터였다.효포 능치 싸움은 10월 24일과 25일 양 일간 벌어졌다. 23일저녁 동학군이 계속 포를 울려대자 24일 새벽 효포를 지키던 관군이 퇴각, 이 틈에 동학혁명군이 능치를 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관군은 … 포위망은 산길 40 리에 걸쳐 사람 병풍을 두른 듯했고, 총과 창이 숲을 이루고 깃발은 능치에서 금가에 이르는 넓은 뜰을 온통 덮었다 고 적었다.그러나 일본군 신식 무기로 무장한 성하영 윤영성 백낙완의방어선은 뚫리지 않았다. 비를 뿌리고 날이 어둑어둑 할 무렵에겨우 싸움이 멎었다.25일의 싸움도 능치에서 계속되었다. 이른 아침 전봉준은 홍색 덮개의 큰 가마에 올라 오색기를 흔들며 동학혁명군을 지휘했다.그러나 동학혁명군은 모리오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군에, 전날 대교리에서 5천 동학군을 격파한 홍운섭 군이 가세하여 한층막강해진 화력을 뚫지 못했다.결국 동학혁명군은 경천으로 물러났다. 이 싸움에서 주검들이 산과 골짜기를 뒤덮었다고 하니 그날의 참상이 어떠했는지짐작할만하다.

● 치열했던 2차 우금치 싸움
11월8일, 전열을 가다듬은 동학혁명군이 다시 진격해 들어갔다.주 공격로는 한마루→대실→삿대울(반송리)→발양→옥고개→오설→막골→우금치였다. 당시 전황 기록에 동학혁명군은산 위 각 요새에 포대를 설치하고 전면 공격에 나섰다.경천 무너미 고개에서 수비하던 구상조 부대를 격파하여 능치로 후퇴하게 하였고, 이인 쪽에서는 성하영 백낙완 부대를 포위공격하여 우금치로 몰아 붙였다.첫날 동학혁명군의 공격은 주미산 아래 오실 막골까지 쳐들어가 진을 쳤다. 한달음에 공주 성을 공략할 만한 기세였다.첫날 공격에 기세가 눌린 관 일본군은최후의 방어선을 우금치 진막골(금학동)곰티 효포 봉수대 견준산 감영 뒷산인 두리봉(주봉)으로 이어지는 물샐틈없는 방어선을 구축했다.한편 밤새도록 산위에서 횃불을 밝히고 대치한 동학혁명군은 11월 9일 날이밝자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처음에는 동학혁명군이 승기를 잡는 듯했다.그러나 일본군의 신무기인 회선포(기관총)를 10여 곳에 배치하여 무자비한 학살이 시작되면서 전세는 반전된다.사시(巳時오전9시) 쯤부터 시작된 전투는 미시(未時오후3시)까지 6시간여 동안 시체가 쌓여갔다.전봉준은 공초에서 2차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고한즉 남은 자가 불과 3천명이요, 다시 2차 접전 후 점고한 즉 5백명에 불과했다 는 말로 그 희생의 참상을 짐작할 만하다.

● 독재 정권의 왜곡된 역사 상징물
우리 근대사의 분수령이 되었던 공주 최후의 전투는 동학혁명군의 꿈과 한이 교차했던 의미 있는 곳이다.일본군의 신식 병장기로 승패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감영뒷산인 한산소와 박산소 송장배미 등지도 모두 동학혁명군의 무덤이다.동학혁명군의 원혼을 달래고 봉기의 대의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탑 건립은 1973년에 이루어졌다.그나마 조부가 동학혁명군이었다는 박정희의 배려로, 5 16군사 쿠데타를 미화하는 구실로 기념탑이 세워졌으니 이는 군사독재 정권의 왜곡된 역사의 상징물이다.그렇다고 동학혁명 1백주년을 훨씬 넘긴 오늘 날도 변변한 기념물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다.



채길순 소설가 ·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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