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 전라지역 투쟁 활동의 연결고리

서천 지역 동학 혁명사의 특징은 동학 혁명군이 서천 한산 지방 관아를 점령하고 탈환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치른다.특히 서천 지역에는 전라 북부 지역의 동학교도들이 합세하여 충청 전라 두 지역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이런기초 자료를 가지고 찾아간 서산 군청 문화 관광과의 동학혁명사에 대한 이해는 한심해 보일 정도였다.일반 군지의 경우에 동학 혁명사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그 지역의 동학 혁명사 몇 줄을 기술하여 구색을 맞추고 있지만 서천군지(舒川郡誌)에는 동학 혁명사에대한 기술이 단 한 줄도 없다.내년 3월에 발행된다는 군지의 원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천 한산 지역의 동학 혁명사는 어느 지역 못지않게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서천전투 등 동학교도 활약상

서천 지방에서는 갑오년 10월 이후에 동학교도들이 활약이 두드러진다.

순무선봉진담록(巡撫先鋒陣膽錄) 갑오 11월22일 조에 남포(藍浦) 주방장(駐防將) 최재홍(崔在弘)이 호우(湖右=충청서남부 지방) 지방에 남포(藍浦) 임천(林川) 한산(韓山) 서천(舒川)에서 추용성(秋鏞聲) 추성재(秋聲在) 이우삼(李友三) 이성구(李性九) 김윤선(金允善) 등 동학 대접주들이 수천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봉기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호남의 김제(金堤) 강명선(姜明善), 임피(臨陂) 김해룡(金海龍) 등이 거느린 호남의 동학군이 금강을 건너와 여기에 합세하니 그 세력은 능히 호우 지방을 한때 장악할 수가있었다.

그리하여 11월 19일 남포에서는 관군이 패하여홍주(洪州) 보령(保寧) 남포(藍浦) 비인(庇仁)의 패잔군들이 도망하여 서천으로 돌아왔는데 그수가 2천 명이었다 고 보고하고 있으며, 이날 한산과 서천이 또한 동학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고보고한다.

당시 서천 전투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상황 기록이 보인다.

동학군은 계속해서 서천 읍을 습격했다.

그리하여 한산(韓山) 수성장(守城將) 김련(金鍊), 호장(戶長) 김하은(金夏殷)은 수성군 수백 명과 홍산 유회(儒會) 최학래(崔學來)가 이끄는 보부상군(褓負商軍)을 거느리고 서천 읍으로 들어갔으나 읍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동학군들은 남북으로 나누어 몇 천 명은서천 삼수동(三水洞) 뒷산으로 집결하고, 또 다른 몇 천 명은 서천 읍 남해안 연포에 집결했는데북쪽 삼수동에는 기치(旗幟)가 온 산을 뒤덮고 포성이 우레와 같이 진동했다.

그리하여 관군 대관(隊官) 윤영성(尹泳成)은북쪽의 산로(山路)에서 공격하고, 대관 이상덕(李相德)은 남쪽의 야로(野路)에서 공격하여 상하에서 협공하니 이 싸움에서 동학군은 수백 명이포살 당하고 수 십 명이 관군의 포로가 되었다위의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는 막강한 동학혁명군을 상대로 관군과 지방 수성군 유회군과 보부상대가 연합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 보부상 연합부대와 치열한 공방전

정부에서는 공주 전투 뒤로 지방이 소연해지자11월 16일 서산 군수 성하영(成夏泳)으로 하여금경리청군을 이끌고 여전히 기세가 등등한 호우 지방 동학혁명군 토벌을 위해 서천 한산 지방으로출동케 하였다.

현재 한산면사무소의 뒷산을 향해 뻗어 있는 토성의 흔적이 백제 때 만들어졌다는 건지산성이다.

일명 주류성이라고도 하는 이 산성은 백제 수도의외곽을 수호할 목적으로 세운 토성이다.

고려시대부터 한산이 큰 고을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방치해 두었던 건지산성을 모체로 높이 16m나 되는 돌성으로 다시 쌓아 한산 읍성을 이루었다.

당시 이 성을 차지하기 위해 동학혁명군과 관군지방 수성군 유회군 보부상 연합군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돌성의 자취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숲으로 덮인 언덕 같은 것이 건지산성의 유적이다.

한산 지역 역시 일찍부터 동학 혁명군의 활동이보인다.

갑오년 이듬 해인 을미년(1895)에 동학혁명 당시 한산 군수였던 백낙형(白樂亨)이 재판을 받는데, 6월 9일 비류(匪類) 김선재(金善在) 서가양(徐可良)이 동학에 수창(首倡)하야행패(行悖)가 무상(無常)하다가 서학(西學)을의적(依籍)하야 악습(惡習)이 무심(无甚)하기로 군옥(郡獄)에 가두어… 하는 판결문 내용으로 미루어 한산 지역은 이미 6월부터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전라도에서 건너온 동학혁명군은 이 지역 동학혁명군과 연합하여 11월 20일 한산 읍과 서천읍을함락했고, 이어 홍산 남포 등지에서 수시로 출몰하며 기세를 떨치자 논산 쪽에서 관군이 이 지역으로 출동하게 된다.

11월 20일에 한산에 도착한 관군이 한산 수성군, 그리고 홍산 유회소의 최학래가 이끄는 보부상 연합부대와 합세하여 한산의 동학혁명군과 일대 접전을 벌였다.

관군의 공격으로 수백 명이 희생된 채 동학혁명군은 퇴각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11월 16일에 관군은 일본군과 함께 공주 성을출발하여 동학혁명군을 수색하며 남하하기 시작했다.

성하영은 11월 19일 부여 홍산을 거쳐 한산 읍성에 도착했는데, 당시 한산 읍 상황을 당일(19일) 오시(午時)께 한산 읍에 도착하니 성 안의민가가 모두 불 타버리고, 각 관아의 건물도 벽만앙상하게 남았는데 향청 관리와 백성들이 통곡을하고 있어 차마 그 참상을 눈으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고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 한산 읍성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짐작케 한다.



< 한산 건지산성 전경. 지금은 숲에 토성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건지산성에서 내려다 본 한산읍. 동학혁명 당시 이 성을 차지하기 위해 동학혁명군과 관군 지방 수성군 유회군 보부상 연합군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채길순 소설가 ·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