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7장 가을 이야기

"물론 시방 자네 수중에 돈이 읎다는 점은 알고 있네. 해서 말인데 당장 논을 자네 앞으로 넘길팅게, 앞으로 농사를 지어감서 갚으믄 되네."

"아이고! 그릏게만 해 주신다믄이야. 죽을 때 까지 그 은혜 갖고 갑쥬. 암유. 우리 여섯 목숨을 살려주시는 은혜를 워지 잊겄슈."

황인술은 이복만이 은근하게 속삭이는 말에 두 눈이 확 떠지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서 넙죽 절이라도 하겠다는 표정으로 이복만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그릏다고 영 손해를 봄서 논을 넘겨 줄 수는 읎네."

"당연합죠. 논을 한 마지기도 아니고 다섯 마지기나 외상으로 주심서 영감님이 손해를 보시믄 절대 안 되쥬."

"그릏다고 말도 안되게 비싸게 팔아서도 안 되고……"

이복만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황인술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잘게 웃었다. 놈이, 논 다섯 마지기를 도지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등기를 넘겨주겠다고 하니까 정신이 너무 좋아서 반쯤 나간 것 같았다.

"처……천만의 말씀입니다유. 등기만 넘겨주신다믄이야. 현물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닝께 장리쌀 이자를 달라고 해두 백번 고맙쥬."

장리쌀이자는 이율이 일 년에 50%다. 장리 쌀 한가마니를 먹고 나면 이듬해 한가마니 반을 줘야하는 엄청난 이율이다. 모산 들판의 논이 일본인 후지모토에게 넘어가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공출이며 각종 세금을 현물로 바치는데서 비롯되는 피해가 가장 크다. 쌀값이 폭락할 때는 정부시세에 맞게 쌀을 바치느라 더 많은 쌀을 내야한다. 반대로 쌀값이 급등 할 때는 정부시세에 맞게 내느라 손해를 보면서 쌀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세금을 현물로 내는 것은 무조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 두 번째 원인은 장리쌀이다. 장리쌀 한가마니를 먹고 이듬해 갚지 못하게 되면 그 다음해에 두 가마니 반이 된다. 쌀 두가마니 반을 찧으려면 벼가 넉 섬 반이 있어야 된다는 결론이다. 한마지기 농사에서 보통 넉 섬이 소출된다. 이듬해 장리쌀을 갚지 못하면 그 다음해는 한마지기 농사를 지어서 모두 주고도 반 섬을 빛내야 하고 결국 2년이 지나면 땅의 등기를 넘겨버리고 소작농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황인술은 아버지가 눈처럼 불어나는 장리 빛을 견디다 못해 논을 후지모토에게 넘겼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땅을 외상으로 준다는 말이 감격스럽기만 해도 장리 무서운 줄도 모르고 넙죽넙죽 절을 했다.

"내 논을 한두 해 부친 것도 아닌데 장리를 쳐서 논을 팔 수 있겄나. 들베미 논은 일 년에 마지기당 소출이 넉 섬 아닌가? 두 마지기믄 여덟 섬 이구먼. 도지를 주는 것도 아니고 아주 자네 땅으로 넘기는 겅께. 여덟 섬씩 이태 농사지은 걸로 해서 그 논은 나락으로 열여섯 석 값만 쳐 주믄 되겄네."

이복만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미리 꺼내 놨던 수판을 들었다.

"예?"

황인술은 이복만이 수판을 드는 순간 왜정 때 이복만이 수판을 들고 도조 계산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같은 조선인이면서 말은 물론이고 되까지 계산하는 것도 부족해서 낙곡까지 악착까지 쓸어 모아 가던 이복만이다. 이 작자가 또 뭔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벙 뜬 얼굴로 반문했다.

"벌똥골 논은 흙이 좋아서 마지기 당 넉 섬 반이 나옹께. 그 머냐, 스 마지기믄 넉 섬씩 시 번하믄 열두 섬에다, 반 섬씩 시 번을 하믄 한 섬 반을 합하믄 총 열석 섬 반이구먼. 요기다 이를 곱하믄 한 해에 스물일곱 섬 씩 소출을 하는 셈인가? 요기다 들베미 거 두 마지기 열여섯 섬을 더하믄 총 마흔석 섬이구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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