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속 '희로애락'
' 우당탕탕!'
새벽부터 아파트 통로를 울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죽여라! 죽여! 차라리 나를 죽여"라며 절규하는 아주머니 목소리 뒤로 "이젠 맞먹는구나. 아주 맞먹어"하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잘 짜여진 시나리오처럼 대사를 치고 받았다.
새벽잠을 설치게 한 어느 부부의 싸움 덕분에 일찍 잠에서 깬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문득 실없는 사람처럼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우리는 말하는 게 죽는 것 아니면 먹는 것뿐인지….
생각해보면 틀리지 마는 아닌 것이 우린 참으로 죽겠다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 않은가?
배가 고파서 죽겠고, 슬퍼서 죽겠고, 좋아서 죽겠고, 억울해서 죽겠고, 아파서 죽겠고, 예뻐 죽겠고, 웃겨서도 죽겠단다. 하다못해 죽을 것 같아 죽겠다고도 한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희로애락에 대한 모든 감정을 우린 죽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만큼 죽겠다는 말이 참으로 일상적이다.
가만 보면 죽는다는 것에서만 우리말이 일가견이 있는 것도 아닌듯하다.
먹는 것은 이보다 더 하지 아니한가?
우리는 나이도 먹는다고 하고, 욕도 먹는다고 한다. 마음도 먹기 나름이라면서 마음도 먹어치우고, 챔피언도 먹었다고 한다.
우린 말속에서 유형이든 무형이든 참 잘 먹는 것 같다. 돈도 먹고 스포츠 경기에서는 골도 먹었다고 한다. 고생하면 겁먹고, 힘이 들면 애도 먹었다고 한다.
말이 잘 통할 땐 말이 먹힌다고도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경우엔 사회 물을 먹었다고도 한다. 하물며 우리는 이메일 주소를 이야기 할 때도 '@'표시를 먹는 골뱅이에 비유하지 않는가?
자연으로 돌아가신 조상님들과의 연결 고리도 우리 제사상이라는 먹거리로 매개체를 두지 않았는가? 홍동백서, 조율이시 이런 말들이 현세의 우리와 어제의 선인을 잇는 주요한 통신수단인 것이 아닌가?
제수로 쓰이는 나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도라지 같은 흰뿌리 나물은 조상님을 뜻하고, 고사리 같은검은 줄기 나물들은 현세에서 살고 있는사람들을 나타낸다. 그리고 시금치 같은 푸른 이파리 나물은 앞으로 태어날 후손을상징한다. 제사상은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또 다른 세상의 통신 수단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들이 거침없이 쓰고 있었던 '죽겠다'와 '먹기'의 단어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닌 듯하다.
곧 보름달이 휘엉청 뜨는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현세의 지인들과 통하려는 핸드폰을 뒤로하고 올 추석엔 저 넘어 세상의 지인들과 통할 수 있는 먹거리 통신 수단을 갖춰봐야 할 것 같다.
| ▲ 김미혜 충북대 교수 객원 논설위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