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7장 가을 이야기
이복만은 황인술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이럴 때는 바짝 조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람, 만약 지가 사년 동안 갚고 나머지 한 해를 못 갚아도 논을 내 놔야 한다는 거유?"
황인술은 마냥 좋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거, 죽 쒀서 개 준다고, 쌔가 빠지도록 일만 해서 나락은 나락대로 주고 논은 논대로 뺏기는 거시 아닌지 모르겄구먼. 방심하고 있다가는 이복만의 술수에 넘어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솔직히, 일 년에 열넉 섬씩 갚아나가야 한다는 거시 쉬운 거는 아녀유. 그런데도 논을 사겄다고 생각한 것은 그 머셔. 이런 기회를 잡지 못하믄 평생 그 논을 찾지 못할 거 가텨서……"
황인술은 갑자기 아버지 얼굴이 떠올라서 목이 메여왔다. 자신도 모르게 술주전자를 들어서 대접에 넘치도록 콸콸콸 따라서 벌컥벌컥 드리켰다.
"쯔쯔……그려, 맞아. 인제 생각해 봉께 그 논이 자네 부친 황칠보의 땅이었어. 자시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빛 때문에 그 논을 후지모토에게 넘겼다는 기 기억나는구먼. 그라고 봉께 내가 생각을 참 잘 한 게로구먼. 우짜믄 이릏게 인연이 기가 막히게 만나는지 모르겄네."
이복만은 황인술의 아버지였던 황칠보를 잘 알고 있었다. 황칠보는 황인술처럼 약아 빠지지를 못했다. 글씨도 알지 못해서 농협조합에서 나온 이자를 두 배나 불려서 달라고 해도 급전을 빌려서 내는 무식한 놈이다. 그 덕분에 장리쌀 두 가마니를 억지로 안겨 준 후에 이런저런 명목을 붙여서 이자를 열가마니로 늘려서 삼 년 만에 논 등기서류를 빼앗았다. 그 대가로 후지모토에게 쌀 한 가마니를 상금조로 받았다. 그 쌀을 학산에 있는 기생집에 갖다 주고 연 이틀 동안 취해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지만 안됐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맞아유. 원래는 그 땅이 우리 땅이었슈. 그려서 지도 언진가는 반드시 그 논을 찾겠다는 생각을 했었슈."
"암, 그려야지. 당연히 그려야지. 그릏지만 맘만 갖고 있다고 논을 찾을 수는 없는 거잖여."
"당연하쥬."
"그람 계약서에 지장을 찍겠는가?"
"하지만 아까 하시는 말씀이 기한내 돈을 다 갚지 못하믄 말짱 황이라고 말씀하셨잖유."
"자네 정성이 기특해서 내가 양보를 함세. 그럼 이릏게 하세. 난중에 돈을 못 갚게 될 때는 내가 돈을 빌려 줌세. 그 돈은 이듬해 쌀로 쳐서 이듬해 갚으믄 되는 거고. 워쪄? 난도 더 이상은 양보를 못하네. 계약서에 도장을 찍겄는가? 아니믄 따신 막걸리 잘 마셨다고 인사나 하고 기냥 갈 거여?"
"도장을 찍쥬."
황인술은 내 돈이 없이 땅을 사면서 무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려, 앞으로 눈 딱 감고 반 십년 만 고생해 보자.
황인술은 계약서에 지장을 찍고 면장댁을 나섰다. 밤이 깊어져서 바람은 더 차갑고 더 날카롭게 이빨을 세웠다. 하지만 내 앞으로 등기가 될 논이 생겼다는 걸 생각하면 자꾸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흐흐흐! 하고 휘몰아치는 바람에 감나무가 우는소리 같은 웃음을 내며 집으로 돌아갔다.
"온 동리 사람들이 면장댁 네 논을 샀다는디 형님도 샀슈?
황인술은 이복만이 자기한테만 땅을 팔지 않고 소작인 모두에게 땅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정월 대 보름을 이틀 앞둔 날이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 전날 밤에는 둥구나무에 고사를 지내는 날이다. 고사에 필요한 제물이며 필요한 물건들을 살 생각으로 지게를 지고 학산으로 가는 길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