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7장 가을 이야기
| ▲ <삽화=류상영> |
황인술은 김춘섭의 말에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 같았다. 이복만에게 외상으로 딴 땅은 마지기 당 열두 섬이 넘게 쳤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람 머여, 그 돈은 은제 갚능겨?"
박태수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얼굴로 빠르게 물었다.
"내참 기가 맥혀서 그 생각만 하믄 시방도 숨이 막히는구먼. 오년 동안 갚아나가믄 되는데, 일 년에 삼할 씩만 갚아 나가믄 된다니께 이걸 워쨔."
"일 년에 삼할 씩 오년 동안 갚으라는기 대관절 먼 말여?"
해룡네가 박태수와 김춘섭을 번갈아 보다가 황인술에게 물었다.
"땅 한마지기를 여섯 섬에 샀으믄 일 년에 한 섬 느말 씩 갚으라는 말이구먼. 완전히 공짜여. 기냥 공짜로 주는 거시 미안항께 기냥 갚는 시늉만 하라는 거여."
황인술은 이복만의 농간에 넘어 간 것이 화도 나지 않았다. 이미 계약서에 지장을 찍은 뒤다. 계약을 무효로 하려면 논 값의 일 할을 위약금으로 물어줘야 한다는 항목에도 엄지손가락에 인주를 듬뿍 묻혀서 찍었다. 이복만 성격이나 좋다면 같은 동네사람이라는 명분으로 사정이라도 해 보겠지만, 바늘로 찔러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작자다. 동네 사람들이 떼로 몰려간다면 지서순경들을 동원해서 모조리 감옥에 집어 놓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갈치 뼈를 발라내며 밥을 먹고 있을 작자라는 생각에 기운이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어채피, 땅 한마지기에 도조만 해도 두 섬을 줘야항께 형님 말이 틀린 말이 아니구먼."
박태수도 이복만에게 열 마지기나 되는 논을 샀다. 황인술 못지않게 기운이 빠져나가는 기분 속에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잘난 이복만 땜에 초상집이겄지만 딴 동네 사람들은 입이 찢어져라 좋아서 소를 잡아도 시원치 않겠구먼."
해룡네가 창백한 얼굴로 넋이 빠져 나간사람처럼 앉아 있는 남정네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소를 잡을 이유도 읎는 거 가텨. 우리동리만 그런 기 아니고, 땅께나 가지고 있다는 지주들은 지난달에 죄다 소작인들한티 팔아 넘겼다느만. 허긴, 지난 이월 이일에 국회에서 법이 통과됐다고 항께 우리츠름 무식한 농사꾼들만 모르고 있었겄지."
황인술은 해룡네만 눈앞에 없었다면 이복만을 때려죽이고 싶다고 욕을 하고 싶었다.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이빨을 바드득 갈면서 술잔을 끌어 당겼었다.
바람이 불었다. 빈 논에서 불어 온 바람에 둥구나무 가지들이 몸을 떨며 나뭇잎을 우수수 떨어트렸다. 황인술은 머리 위에 내려앉은 둥구나무 잎을 떼어서 버리며 해룡네 집 쪽으로 슬슬 걸어갔다. 멀리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 출장을 오기로 한 면사무소의 강서기하고 농협조합의 최서기 일 것이다.
좌우지간 밀린 비료대는 워틱하든 해결을 해야 할텐데…….
두 대의 자전가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강서기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황인술은 강서기의 얼굴이 떠 오르는 순간 밀린 비료대가 생각났다. 구장을 맡고 나서부터 언제부터 동네사람들이 낸 비료대를 횡령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몇 십만 원이 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 시간이 나면 초근이 앉아서 정확하게 얼마를 써 버렸는지 계산을 하고 싶어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은 정확한 계산이 나온다 해도 갚을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려, 조선 천지에 비료대를 꺾어 쓴 놈이 나 하나 뿐이겄어.
황인술은 비료대 갚을 것을 생각하니까 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럴 때 마다 습관처럼 그래왔던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