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1장 한 밤의 밀회

▲ <삽화=류상영>

이병호는 아랫목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지그시 술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옆에는 한 보루에 천 환씩 하는 백양담배 두 보루가 신문지에 쌓여 있다. 윗목에 스승을 뵈러 온 제자들처럼 긴장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강서기와 최서기가 사 온 것이다.

강서기는 청주 잔에 입술만 살짝 대고 마시는 시늉만 하고 옆의 최서기를 흘끔 바라본다. 최서기도 무릎 끓고 앉은 자세가 불편한지 양발을 신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그러나 표정은 한없이 존경하는 스승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다.

비봉산 쪽에서 바람에 사납게 불어와서 문종이를 후려 갈긴다. 이어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 소리가 잦아드는가 했더니 이내 새들이 요란하게 우는 소리가 바람의 꼬리를 물고 들려온다.

"오늘이 미칠이나 됐나? 자네들 같은 사람들이 우리집이를 오지 않으믄 죙일 혼자 앉아 있응께 당최 세월 가는 줄을 모르겄구먼."

이병호가 양발도 신지 않은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슬슬 긁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이 음력으루는 구월 열이레유. 양력으로는 시월 스무날이고……"

"그람, 냘 모리 글피가 추분인가?"

"예, 그때 부텀은 밤이 짧아지기 시작한다고 하잖유."

강서기는 이병호가 묻는 대로 꼬박꼬막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이병호가 입을 다물자 강서기도 할 말이 없다는 얼굴로 벽에 걸려 있는 산수화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면장실에 걸려 있는 산수화에 비교를 하면 조잡하고 구도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면장님, 올게는 작년보담 소출이 많이 늘었다고 들었슈. 다른 분들은 평년작이든데, 면장님은 워티게 농사를 잘 지시는지 해마담 소출이 는대유? 지가 알기루는 작년에도 학산면에서는 둘째라믄 서러워 할 정도로 소출이 좋았다고 하든데……"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최서기가 마침내 화제꺼리를 찾았다는 얼굴로 물었다.

"크음!……농사를 내가 짓남?"

이병호는 강서기가 묻는 말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둥구나무 거리에 있는 논을 얻기 위해서 땡볕 밑에서 개미처럼 모를 심던 동네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등신 같은 놈들이 뙤약볕 밑에서는 입술에 물집이 생기도록 일을 해 놓고도 어느 놈 하나 도지를 달라고 하는 놈이 없었다. 만약 도지를 달라고 하면 올해는 귀중한 손자를 얻어서 부정이 탈지 몰라 도지를 줄 수가 없노라고 점잖게 핑계를 대려고 했었다. 그런대도 황인술을 비롯해서 윤길동이며 김춘섭 모두 말 한마디 없는 걸 보면 미련하게 내년을 기약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면장님이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셔두 먼가 비법이 있으실 거 가튜. 그릏지 않고는 똑 같은 땅에서 그릏게 소출이 해마다 늘리는 읎잖유. 안 그려 강서기?"

"지가 생각할 때도 먼가 비법이 있는 거 같아유. 우리 면사무소의 면장님도 땅이 한 오십 마지기 되는데 칠 할은 도지를 줬거든유. 근데 해마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딱 저울로 단것츠름 소출이 똑같다고 하시드만유."

"우리 조합장님 근동에서는 땅이 젤 많아유, 헌데 올해는 외려 소출이 줄었다고 하시드만유. 비료값이다 머다 해서 농비는 더 많이 들어가구유. 그래서 후년에는 죄다 땅을 내 놀 생각이시래유. 직접 농사를 짓는 거 보다는 도지를 주는 것이 곳간에 들여 놓는 나락은 짝지만 맘은 편하시다구말유."

이병호는 최서기를 바라본다. 최서기는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서 헛기침을 하며 괜히 어깨를 들썩인다. 그 조합장에 그 서기라고 모두 숙맥처럼 보여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청주 잔을 들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잔의 온도는 소슬한 가을 날씨에 걸맞게 따뜻하다.

히히히……참새가 봉황의 뜻을 알까. 니까짓 거들이 백날 기도를 해 봐라. 이병호의 발가락 끄트머리만큼이나 따라 올 수 있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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