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실크로드와 고선지 장군의 길

▲ 사진 1 고선지 장군이 주둔하였던 시바스고성의 모습 사진 2 고선지 장군이 활약하던 구자고성의 흔적 사진 3 고선지 장군이 주둔하였던 시바스 고성의 흔적을 돌아보는 일행들 사진 4 고선지 장군이 넘었을 파미르고원의 옛길 사진 5 파미르고원의 절벽 길을 오르는 사람들 사진 6 고선지장군의 원정로(인터넷 자료)
실크로드의 주인공이자 경영자인 한민족의 후손 고선지 장군 이야기를 처음 들어본 것은 1995년 파키스탄의 실크로드와 낭가파르밧 트레킹을 하며 길기트 부근의 훈자왕국을 지날 때였다. 카라코람의 협곡에서 생각하지 못한 고선지 장군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느끼던 희열을 잊지 못하고 있다. 감동을 받고 한 방송사에 고선지 장군의 활약상을 드라마로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해 보았으나 당시로는 쉽지 않았고 조만간 한·중·일 합작으로 만들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자료들을 참고해 살펴보니 장군이 태어난 곳과 시기의 기록은 없고, 고구려가 망하자 조부와 함께 아버지가 당나라로 넘어와 무장으로 근무한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것이다. 투루판에 있던 안서도호부가 659년 쿠처로 옮겨오자 아버지를 따라와 이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다.
20세에 유격장군이 된 것을 보면 주변의 지형을 잘 이용하는 유격전에서 뛰어난 명장이었나 보다. 파미르고원을 넘어 현재의 키르기스스탄과 파키스탄 북부지역의 72개국을 정복하였고 안서군 총사령관이 되어 타슈겐트를 토벌했다.
722년 천산서쪽의 사막과 고원을 지나 험로를 통하여 2000명의 기마부대로 발해부를 기습하여성공을 하였으며 733년 무렵 안서도호부 부도호로 승진한다.
5부에서 설명한 쿠처의 시바스 고성에 당나라의 안서도호부 본진이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안서도호부로 근무한 고선지 장군이 활동하였던 쿠처 지역을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다.
실크로드의 정복자 고선지 장군은 3차에 걸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수많은 전투를 하며 명성을 날리게 되니 간단히 소개를 하면, 1차 원정은 747년 토번(티벳)이 소발률국(파키스탄 길기트 훈자왕국 부근)을 이용 통상로를 장악하려 하자 당 현종은 고선지를 행영절도사(원정군 사령관)로 1만 군사를 편성하였다. 쿠처를 출발 카스갈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군이 주둔하는 연운채를 공략하고 흑운산을 점령하여 적군 7000명 사망, 1만명 포로, 아군은 1000명의 사상자를 낸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소발률국의 항복을 받고 주변의 20여 나라를 평정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소발률국은 4939m의 쿤제랍 패스(파키스탄과 중국의 국경선지역, 야생파가 많아 총령이라고도 부름)를 넘는 대장정으로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은 나폴레옹의 알프스 원정보다 더 성공정인 일로 극찬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귀향길에 카스갈을 지나 호탄에서 환영을 받고 쿠처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안서도호부 절도사로 승진을 한다.
2차원정은 750년 토번이 회교도인 사라센제국과 손을 잡기 위하여 갈사국(파키스탄의 치트랄 지방)을 점령하자 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단수실, 이사엽 두 장수와 1만 명의 군사를 편성 공격하니 석국(타슈켄트)의 나구차비시 왕은 성벽에 백기를 내걸며 항복을 하고 석국 왕을 장안으로 후송을 한다.
3차원정은 751년 장안으로 압송한 석국의 나구차비시왕을 목을 처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 소식을 들은 석국과 주변 국가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고선지 장군을 원정사령관으로 3만의 군사를 편성하여 토벌을 하나 탈라스 강변에서 패배를 한다. 사라센 역사에는 당군 5만명이 죽고 2만이 포로가 되었다고 적고 있어 병력 숫자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때 태륜이 발명한 종이 만드는 기술이 유럽으로 전래 되었다고 전한다.
1· 2차 천산남로의 원정에서는 대성공을 하고 3차 천산북로의 원정에서 패전을 하지만 패전한 고선지 장군을 당 현종은 우림군 대장군에 밀운군공이라는 작위를 내린다. 변방의 장수가 아닌 황실의 대장군으로 식읍까지 하사받는 귀족이 된 것으로 보아 고선지장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그 후 755년 안녹산의 난에 고선지 장군이 토벌군 부원수로 출전하나 관리 변영성의 모함에 죽임을 당한다.
한민족의 뛰어난 인물인 고선지 장군을 세월을 건너 만나는 감회가 묘하다. 그것도 남의 나라 역사속의 인물로 소개를 하고 있으니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지구촌의 어떤 사람들은 한민족의 위대한 인물로 고선지, 이 순신, 박 정희 세 사람을 선정하였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군사전략가로 평가받고 있는 고선지장군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아 볼 길이 없어 아쉬움은 더하고 다만 풍란의 한 시대를 함께 살았으며 고선지를 사랑하는 당나라 시인 두보가 지은 '고도호총마행'의 시 한편이 떠오른다.

- 고도호총마행-
안서도호부 고선지 장군의 푸른 말이
높은 이름과 명성을 실고 돌아오네
오랜 세월 전쟁터에서 맞설이 없었으니
말과 사람이 하나 되어 큰 공을 세우고
주인의 은혜 입어 함께 돌아오고 있네
아득한 모래땅에서 달려오고 있네
마구간에 엎드려 은혜를 받지 않고
싸움터에서 달릴 생각을 하는 용맹함이여
짧은 발목 높은 굽은 쇠를 디디듯
교하에서 몇 번이나 얼음을 밟아 깨었던가
오화문은 흩어져 구름처럼 몸에 가득하고
만리를 달리면 땀에서 피가 섞여 흐르네
장안의 젊은이여 감히 이말 타려 하지 말게
번개를 스치며 달리는 것을 모두 알 터이니
푸른 실로 머리 묶고 고장군 위해 늙어갈 뿐
언제 다시 횡문으로 달려가 보려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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