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1장 한 밤의 밀회

▲ <삽화=류상영>

"아녀유. 쪼끔만 있으믄 보리씨를 뿌릴 때가 됐잖유. 그 문제 때문에 구장 좀 만나야 하고 이런저런 할 일이 있어서 그만 일어 나겄슈."

"지도, 면장님한테 인사드리러 온 김에……그 머셔, 연말도 다가오고 해서 대출금 변제 독촉 좀 해야겄슈."

"그랴 그람. 내 생각 같아서는 읎는 찬이지만 같이 먹고 싶지만 안되겄구먼. 명색이 평생 공무원으로 살아 온 내가 공무를 못하게 하믄 안되지. 그람, 더 이상 붙잡지 않을팅께 어여들 가 봐."

이병호는 강서기와 최서기의 말을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손을 내저었다. 상아 파이프에 백양 담배를 꽂아서 마당 쪽을 향해 돌아앉았다. 세배를 온 것처럼 큰 절을 하는 강서기와 최서기를 일부러 쳐다보지도 않고 담뱃불을 붙였다.

면장댁을 나온 강서기와 최서기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담배를 입에 꼬나물었다. 대문 앞에 세워두었던 자전거 앞에서 강서기가 성냥을 꺼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말없이 최서기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솟을대문을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낮게 엎드려 있는 하늘에 높게 솟아 있는 대문이 오늘 따라 낯설게 보인다.

완전히 똥 밟았구먼. 대관절 면서기를 뭘로 보고 그 지랄로 무시하는 거여.

강서기는 대문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자전거에 올라타지 않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면장댁에서 둥구나무 까지 거리는 비스듬하게 내리막이다. 자전거를 타면 페달을 밟지 않고도 부드럽게 내려 갈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전거를 타지 않고 끌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둘은 어깨 뒤로 담배 연기를 날리며 넓은 골목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골목 중간에서 또 다시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걸음을 멈추었다. 늦가을바람이 서성거리고 있는 둥구나무 밑에는 어른들은 보이지 않고 아이들이 쪼그려 앉아서 땅 따먹기를 하고 있다. 둥구나무 뒤로 허허로운 바람이 나부끼고 있는 들판을 바라보던 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본다.

"강서기 너무 하는 거 아녀? 솔직히 나는 우리 할아부지 집에 가도 큰절 안 햐. 내가 저 인간한티 신세 진 것도 읎구, 순전히 부면장님 얼굴 봐서 디다 본 거 잖여. 부면장님 생각해서 큰 절까지 했는데 일부러 딴 데를 쳐다본다는 기 말이나 되능겨."

최서기가 기분이 너무 나빠서 간신히 참고 있었다는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츠, 그러기 왜 큰 절을 할라고 두 손을 배꼽 앞이다 얌전히 갖다 대능겨. 난 솔직히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나올라고 했구먼. 하지만 최서기가 큰 절을 할것츠름 자세를 잡응께 워틱햐. 나 혼자 멀뚱하게 서서 인사 할 수도 읎구 해서 큰 절을 했잖여."

"남말 하고 앉아 있구먼. 난 최서기가 두 발을 나란히 모으길래 큰 절을 할라고 하는 줄 알았지."

"그른 사람이 나보다 먼저 엎드려서 절을 했구먼. 나는 인사성도 읎는 놈이 얼떨결에 따라서 하는 꼴이 되어 버렸고?"

"시방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니가 잘했고 내가 잘했다는 말을 하자고 하는 기 아녀."

"난두 알아. 솔직히 기분 나쁘기로 치자믄 욕이라도 한 소쿠리 해 줘야 속이 시원할까 말까지 머. 하지만 부면장님 얼굴이 있응께 그럴수도 읎는 노릇이잖여. 그랑께 이쯤에서 그만 둬."

강서기는 생각 같아서는 마음 속에 담겨 있는 욕을 모두 뱉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최서기는 조합에서 입이 싸다고 소문이 난 작자다. 언제 어느 시에 강서기는 성질이 나면 못하난 말이 없는 놈이라는 소문이 농협조합까지 파다하게 번지게 될지 모를 일이다. 화가 나긴 했지만 이쯤에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침을 퉤 소리가 나도록 내뱉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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