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보는 자세에 따라 그 결과는 천지차이다. 필자는 한 사례를 통해 '관물자세(觀物姿勢)'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2009년 10월 8일 목요일 '수의동마을조사회의'차 갔다가 그 주인공 송태화님을 뵙게됐다. 그분은 청주시 서촌동 들 가운데 있는 작은 동산이'장고형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필자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일어 현장에 가보자고 재촉했다. 송원섭님, 김홍현 강서1동면장님과 함께 송해학님의 차를 타고 현장을 찾아갔다. 송태화님과 함께 그 동산에 올라가보았다. 흙산인데 잔돌과 큰 돌이 섞여있다. 함께 간 모든 분들이 외형이 '장고형'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주변 논에서 벼를 베는 이재근어른께 산이름을 여쭈어 보았더니 벌미산이라고 한다. 송태화님께 이 산에 얽힌 전설이나 또 다른 명칭을 조사해보아야한다는 점을 말씀드렸다.
10월 13일 그분이 전화를 했다. 평촌에 사는 유사형 등 주민들이, '벌미산이 부모산에서 떠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다고 말했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그 말은 '무덤을 만들 때 흙을 부모산에서 떠왔다'는 말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와전된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미산' 가능성 농후


그 동산이 '장고형 무덤'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가릴려면, 발굴을 해서 광중과 유물의 존재여부를 확인하면된다. 우선 지금껏 취득한 사실을 정리해보자. 첫째, 그 동산이 외형상으로 장고형이라는 점은 인정된다. 둘째, 항공촬영한 사진에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가 완연하다. 셋째, 들 복판에 무덤을 쓸 때 부모산에서 흙은 떠왔다면, 부모산과 벌미산의 토양의 성분을 분석대비해보아야 한다. 넷째, 부모산에서 흙을 파다가 무덤을 만들었다면, 부모산에 흙을 파낸 자리가 남아있을 수 있다. 다섯째, 일본의 장고형 무덤은 무덤 둘레에 조성한 연못 즉 해자(垓字)가 지금껏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장고형 무덤' 주변에도 해자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적도에 벌미산 주위 논들은 벌미산과는 번지가 다르다. 또 이 지적도에 벌미산을 둘러싸고있는 논의 모양이 마치 벌미산 주변에 조성했던 해자의 흔적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로 좁고 길다.
멀지 않은 정북리 들 가운데 토성을 축조했듯이, 그 전후 시기 청주일대를 지배하던 세력의 우두머리가, 후손들로 하여금 그 땅을 온전히 지키려는 의지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 자기 관할지역의 들 가운데 묘를 쓰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제시한 사실을 통해 볼 때, 필자는 '장고형 무덤'여부를 판별하기 위해서라도 발굴조사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원형 그대로 유지해야

이 동산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금의 원형을 훼손하지 말고 잘 유지보존해야한다. 그 진위는 발굴을 통해 판명되겠지만, 한편 필자가 중시하는 점은, 그 동산을 예사로 보지 않은 송태화님의 고아한 정신세계다.
송태화님의 예리한 관찰력과 높은 식견, 학술적으로 규명하려는 강한 집념, 우리 문화에 대한 지극한 애정, 우리 역사에 대한 진한 자긍심에 경의를 표한다. 이런 분들이 많을수록 알려지지 않은 내 고향의 문화재가 생명을 얻고 역사가 올바로 정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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