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1장 한 밤의 밀회

"왜 몰라유? 아무려면 지 보다 십사 년은 더 사신 분이……"

"모르겄다. 나는 세상을 살아갈수록 세상이 더 어려워지는 거 가텨. 남들은 나이가 들믄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는 것이 생긴다고 하든데, 나는 지혜는커녕 알고 있는 것도 자꾸만 까먹는 거 가텨."

들례는 쓸쓸한 표정을 감추고 않고 막걸리 잔을 들었다. 소리없이 내리고 있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자신이 술잔을 들고 있었다는 얼굴로 막걸리를 마셨다.

"그려유. 시방 사모님이 남 걱정할 때가 아니쥬. 하지만 워틱하겄슈. 이기 팔자려니 살아 갈 수 벡에 읎잖유……"

춘임은 들례를 바라본다.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는 들례의 얼굴이 몹시도 우울해 보인다. 모산에 가있는 이동하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전자를 들어서 술을 따라 주면서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려, 팔자겄지. 이기 네 팔자겄지. 부모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년이 먼 놈의 팔자가 좋겄어. 옥천댁의 팔자는 설흔이 넘은 이 나이에도 아들을 낳아서 서방의 정을 돌려받아 따끈따끈하게 사는 것이 팔자고, 이 년의 팔자는 맨날 헛떡꾹만 먹고 살라는 거시 팔자겄지……

들례는 쓸쓸한 표정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신세한탄을 하다 보니 문득 승철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승철의 방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려, 서방 복도 지지리 읎는 년이 먼 놈의 자식 복이 있겄어.

이 시간에 공부를 할리는 없고 또 만화책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만화책 좀 그만 보고 공부를 하라고 했다가 승철이한테 모진 소리를 들었던 때가 떠오른다. 승철이 학교에 갔다고 오면서 만화책을 한아름 안고 집에 들어오던 날이다.

"엄청 덥지, 승철이 오믄 줄라고 샴 안에 참외 당가 놨는데 한 개 깎아 줄까?

들례는 양철 대문을 들고 들어오는 승철의 얼굴에 땀이 흐르는 것을 보고 맨발로 뛰어 나가서 등의 가방을 벗겨내며 살갑게 물었다.

"안먹어."

승철은 들례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궁금해 견딜 수 없다는 얼굴로 만화책의 표지를 바라본다.

"으메, 승철이 또 만화책 빌려 왔구먼 누나도 같이 봐도 되겄지?"

춘임이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서 토란줄기 껍질을 벗기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며 반갑다는 얼굴로 물었다.

"유모, 나 감자 먹고 싶어. 춘임이 시켜서 감자 좀 쪄 달라고 햐."

승철은 춘임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대청마루 앞에서 신발을 벗어 던지며 들례에게 명령을 하듯 말했다.

"승철아 만화책을 볼 때는 보드라도 숙제부텀 하고 봐. 냘 아침에 숙제한다고 지각해서 지난븐처럼 면사무소 박 씨 부르지 말고. 응?"

승철은 며칠 전에도 밤이 늦도록 만화책을 보느라 숙제를 하지 못했다. 아침에 숙제를 하느라 지각을 할 것 같으니까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면사무소 소사 박생수를 불러서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준 적이 있었다. 들례는 주인집 도령처럼 야박하게 자신을 대하는 승철이 야속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그 보다는 숙제 걱정이 돼서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아까 머라고 했어?"

승철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홱 돌아서서 들례를 노려본다.

"머라고 했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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