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2장 달 그림자

▲ <삽화=류상영>

비가 내리는데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수직으로 내리는 빗줄기는 바늘이 되어 들례의 가슴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들례는 춘임이 눈치 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려, 안직은 실망할 때가 아녀. 승철이가 있잖여. 그것이 안직은 어려서 뿔난 망아지츠름 지 멋대로 굴지만 나이가 들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게되믄 날 이해하겄지. 그때는 숯처름 새카맣게 타 들어가는 어미의 심정을 백가지는 다 이해 못해도 다믄 열 가지는 이해 해 주겄지.

들례는 닫혀 있는 승철의 방문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춘임이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해가 바뀌면서 정국이 발칵 뒤집혀 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1월 중순에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을 비롯한 간부들이 모두 간첩협의로 구속이 되었다. 국민들은 5월 총선을 앞두고 야당을 길들이려는 수작이라고 간첩협의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신문은 연일 진보당 간부들을 잡아들이고 구속을 시키고 조사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도배를 했다.

정국이 어수선해서 해가 바뀌었어도 서울은 새해 분위기는 쉽게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 두 세 명만 모이면 귓속말로 간첩집단이니 야당탄압이니 갑론을박을 하며 술잔을 비웠다. 그러다 목소리가 커지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허튼 소리를 하다 감옥을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터져 나오려는 불만을 안으로 꾹꾹 삼키느라 깡술을 마셔댔다.

어느 대학 교수는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 화가 풀리지 않아 택시 운전사에게 도대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고 하소연을 했다. 택시 운전사는 말 한마디 없이 택시를 경찰서로 몰고 들어가서 간첩이라고 신고를 해 버렸다.

서울은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안개에 쌓여 있는 정국이 계속되고 있지만 모산은 딴 나라 사람들처럼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음력설을 쇠는 모산에서는 내일이면 올해가 지나가고 새로운 한 해를 맞는 진정한 새해가 된다. 아침부터 설날 차례를 지낼 음식을 준비하느라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남정네들은 아침부터 귀를 빨갛게 얼리는 날씨에 허연 입김을 토해내며 뒷간부터 퍼내기 시작했다.

뒷간은 이삼 일 전에 미리 퍼 낼 수도 있으나 묵은똥을 새해까지 갖고 가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오늘 뒷간을 퍼내는 집이 많았다. 그 탓에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똥장군을 지게에 진 남정네들이 칼바람에 딸기코가 되어 버린 코를 벌름거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뒷간의 거름을 깨끗하게 푸고 나서는 집구석구석을 청소하며 새해를 맞을 준비를 했다. 나중에 언젠가 쓸 요량으로 뒤안이나 헛간에 던져두었던 새끼를 잘 감아서 찾기 쉬운 곳에 두고, 흙이 묻은 채로 헛간 벽에 걸려 있는 삽이며 괭이는 우물가로 들고 가서 깨끗하게 씻었다. 초가지붕의 이엉이 밀려 내려와서 비가 샐 우려가 있거나, 참새들이 구멍을 파 놓은 부분은 짚으로 단단하게 쐐기를 박았다.

사금파리처럼 날카로운 빛을 반사하던 해가 넘어가고 어스름 저녁이 되자 황인술의 집으로 남정네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랑채 댓돌 위에는 컴컴해지기 전에 벗어 놓은 고무신이 가득했다. 뒤꿈치가 찢어져서 실로 꿰맨 고무신도 있고 원래는 흰색이었으나 낡아서 재색으로 변한 고무신도 있다. 울타리에 매달려 있던 마른 상수리 나뭇잎이 쌩하니 날아와서 댓돌 밑 마당에 떨어져 있는 고무신 안으로 들어갔다.

동그란 무쇠 문고리가 차갑게 걸려 있는 방문 안에서는 가끔 와하하하! 거리는 남정네들의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웃음소리가 잠시 줄어들면 무시로 부는 찬바람 속에 남정네들이 두런두런 말을 주고 받는 소리가 마당으로 새어나온다.

<계속>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