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2장 달 그림자

▲ <삽화=류상영>

이동하가 물러난 다음에 순배영감부터 절을 했다. 순배 영감이 물러난 후에 누구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작년이나, 그 앞 전해처럼 변쌍출이며 박평래 순으로 조용히 절을 하기 시작했다. 둥구나무가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냉기를 품은 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 갈겼다. 그래도 기다리는 사람은 경박스럽게 발을 동동 구르거나, 어 춥다! 추웅께 빨리빨리 서둘러, 라고 재촉하는 사람이 없었다. 찬바람이야 불든 말든 손가락이 얼든 말든 장승처럼 움직이지 않고 경건한 얼굴로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동네 아이들은 어른들이 엄숙한 모습으로 절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서 어른이 되길 빌었다. 어른이 되어야 고사상 앞에서 절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중에는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먼다고, 어서 빨리 고사가 끝내기를 기다리며 맨발에 고무신을 신은 발이 시려워서 발을 동동구르는 아이도 있었다.

"해룡이도 소원 좀 빌어 봐."

"그려, 올개는 장가를 가야지. 장가가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어 봐."

"어떤 색씨가 해룡이한티 시집올지는 모르겄지만, 시상에서 젤 편할 껴. 생전 예핀네를 혼을 낼 줄을 아나, 술을 먹었다고 생전 술주정을 하나, 신랑감으로는 더 없이 좋지 머."

해룡이가 절을 하고 싶은지 고사상 옆에서 손가락을 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던졌다.

"그려, 해룡이도 내 후년이면 서른여. 절 못할 거시 읎지. 어여 절을 햐. 올게는 꼭 장가 가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어 보란 말여."

해룡이가 실실 웃으며 해룡네의 눈치를 살폈다. 해룡네는 깜박 잊고 있었다는 얼굴로 해룡이의 손을 잡아끌어서 고사상 앞에 서게 했다.

해룡이는 히죽히죽 웃으며 고사상 앞에서 무릎을 끓고 앉았다. 박태수가 웃는 얼굴로 술을 채워주었다.

바람이 불었다. 촛불이 흔들거리면서 고사상 앞에 앉아 있는 해룡의 얼굴에 나뭇가지가 그림자를 만들어 놓았다.

윤길동의 딸 향숙은 절을 하려고 고사상 앞에 서 있는 해룡의 몸에서 푸른 연기 같은 것이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기 머여?

해룡의 몸에서 빠져 나온 푸른 연기가 빠르게 허공중에 원을 그리며 그녀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어서 입안이 하얗게 마르는 느낌 속에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장마 때 황토물이 방천을 집어 삼킬 것처럼 넘실거리는 또랑가에 서 있을 때처럼 머리가 아득해 졌다. 비틀거리는 순간 해룡의 육신이 하얀 빛 덩어리가 되어 가슴에 안기는 것 같았다. 가슴에 안긴 해룡이 해죽 웃으며 혀로 얼굴을 핥았다. 순간 온 몸이 짜릿해지는 가 했더니 가랑이 사이에 뜨끈한 액체 같은 것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서 집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하며 뒷걸음을 쳤다. 따뜻한 봄바람 같은 기운 얼굴을 감싸는 느낌이 들면서 다리의 힘이 하얗게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저……저 뉘여!"

향숙이 스르르 주저앉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짤막하게 외쳤다.

"햐……향숙이 아녀?"

"머시라! 향숙이라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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