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공간구성 틀을 깨지 않게

신라 천년의 풍류(風流)와 비극이 교차했던 포석정. 경애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이 곳에서 주연을 베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견훤의 후백제군이 침입 삽시간에 피바다를 만든다. 왕을 자진(自盡)케 하고 그 자리에서 왕비를 강간하는 것이다.

신라는 이 사건으로 사실상 천년 사직을 왕건에게 넘겨주는 역사적 비운을 맞는다. 견훤은 군사들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3백년전 우리 백제가 신라에 당한 치욕을 이제야 갚았노라"고. 보복의 역사 현장이 하필 풍류의 포석정였을까.

전북 익산 백제 무왕의 별궁터에서도 최근 포석정이 찾아졌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이 유적은 미륵사지와 더불어 무왕의 이궁터로 오랫동안 발굴 작업이 이뤄진 곳이다.

익산은 바로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왕도. 견훤은 왕궁리의 전설을 듣고 자란 장정들을 등에 업고 나라를 세웠다. 왕궁이 바로 익산이 멀리 않은 곳에 자리 잡은 동고성(東固城). 백제 멸망당시 무왕의 별궁 안 포석정도 신라군에 의해 유린 됐던 것은 아닌지.

포석정은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풍류로 대변되는 유적이다. 수로를 굴곡지게 만들어 놓고 물을 흐르게 하여 술잔을 띄운다. 그리고 각자 앉은 자리에 술잔이 오면 들어 술을 마시며 시 한 수 읊었던 장소였다.

경애왕에게는 비극의 현장이었지만 역대 신라 제왕들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고 술과 음악으로 상하 소통 했던 풍류의 장이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발굴결과를 통해 연회장소이면서 신성한 제사터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면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원류는 어디서 찾을까. 기록을 보면 이 풍류가 시작 된 것은 4세기 고대 중국의 명필가 왕희지에서 비롯 됐다고 한다. 왕희지가 저장(浙江)성 난정(蘭亭)에서 열린 유상곡수의 연회에 참석한 뒤 명사들의 시를 모아 '난정서(蘭亭序)'라는 서문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 글은 지금도 불후의 명작으로 회자 되고 있으며 유상곡수연이 당대 시인들 사이에 유행이 아니었나 싶다. 이 풍류가 삼국시대 유학생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을 보면 왕희지의 난정서를 흠모하는 곡수연(曲水宴)의 풍류시가 나온다. 이글로 보아 고려시대 명사들 사이에도 유상곡수를 즐기는 풍류가 만연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포근한 날씨 햇볕은 따사로운데/ 산들바람 불어와 푸른 소나무에 몸 기대고 /두건을 젖혀 쓰고 흐르는 물에 둘러 앉아 술잔을 띄우네 / 정의 봄 수계를 그리워하며 하삭(河朔)의 피서하던 술잔을 상상하리라"

또 다른 기록을 보면 고려 왕실에서도 음력 3월3일이면 궁중의 뒤뜰에서도 여러 관리들이 모여 물가에 둘러 앉아 이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경 만수대 왕궁터에도 이런 유적이 나올 법 법하다.

이 유상곡수연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삼월 삼짇날이면 선비 들은 시냇가에 모여 시회를 베풀었다. 이 행사에는 노소 차별이 없고 장인이나 사위까지도 함께 참가 술과 시를 즐기고 놀았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기생은 가야금을 뜯고 창가를 불러 화답했다. 바로 상하, 노소 구별 없는 소통과 화합의 한마당이었다. '사람이 강하지 않고 완곡(緩曲)해야 오래 살아남는다(古之所謂曲則全者)'라는 노자(老子)의 둥글둥글 철학을 옛 제왕이나 선비들은 실천한 때문일까.

백제 포석정의 등장은 경주 포석정에 이어 백제인의 여유와 뛰어난 조원(造園)능력을 보여준 유적이란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들에게 모나지 않는 완곡함과 화합의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 황재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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