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스러운 고집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시골에 가면, 시할머니께서는 손쉽게 밥을 만들어내는 전기밥솥이 있음에도, 장작불을 지펴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지어 주셨다. 그럴 때면, 아이들과 나는 할머니 곁에 쪼그리고 앉아 구수한 장작불 냄새와 쌀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으면서 뜸이 들기만을 기다렸다. 밥을 다 푼 후에 긁어 주시는 쟁반만한 누룽지와 구수한 숭늉 때문이었다. 누룽지나 숭늉은 기다림이 빚어낸 선물인 듯싶다.

기다림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연상되는 녀석…….

반나절 동안에 선생님을 수 십 번씩 찾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저학년 적응과정은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허기를 느끼게 한다. 작은 시골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오후 시간에도 교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아이들을 보내고 정신없이 교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교실 뒷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온 아이는 멋쩍은 듯이 웃으며,

"1학년은 벌써 갔어요? 우리는 청소하고 가야 되는데……."

하고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내뱉고 주위를 서성이다 주섬주섬 책상 위에 얹어 놓은 의자를 내린다. 2학년이 된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건만 1학년 교실 주위를 뱅뱅 돌고 있는 아이.

스무 해 넘게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이젠 길 가다가도 어디선가 '선생님'하고 부르면 어김없이 그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곤 한다. 이 쯤 되면 흔한 말로 도가 텄을 법도 하건만, 언제쯤 부끄럽지 않은 한 해를 돌아볼 수 있을지.

몇 해 전, 설레임과 기대와 다소의 걱정으로 맞았던 입학식 날, 범상치 않은 녀석이 자신이 오르기 험난한 산임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두각을 나타냈다.

'귀여운 녀석들, 기다려라. 선생님이 많이 사랑해 주마.'

여유로운 미소로 첫 만남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20여년을 걸어온 교사로서의 노련함과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엄마라는 이름은 내 비장한 무기였다. 하지만 그 자신만만함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취를 감출 수 밖에 없었다.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가진 그 녀석의 눈은 마음을 헤집어 놓았고, 억지와 심술궂은 행동은 내 인내심을 무너뜨렸다. 이제야 나와 마음이 하나가 되었나 싶어 내심 기뻐하고 있으면 어느새 처음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아이의 행동은 나를 점점 지쳐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매일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키는 아이를 윽박지르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하고 약속도 하면서 보내야 했고, 그럴수록 온통 머리 속에는 이 아이의 화가 나에 대한 믿음으로 눈 녹듯이 녹아 주었으면 하는 기다림이 희망이었다. 하지만 기다림의 한계에 먼저 지친 내게,

"선생님은 나만 미워해. 내 말은 들어주지도 않고."

하고 막무가내로 소리쳤던 모습이 생생하다.

어쩌면 나의 대처 방법에 교사의 억지스러운 고집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 발 다가가면, 어김없이 한 발 뒷걸음치는 아이의 모습에서 나는 조급해졌고 둘 사이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우습게도 그 아이의 행동은 어느새 학교를 벗어난 내 생활 속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녀석 때문에 힘이 솟았고, 녀석 때문에 교사로서의 무능함에 좌절하기도 했고, 녀석 때문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고, 녀석 때문에 실없이 종일 웃기도. 결국, 내가 벌린 품 안으로 달려와 주기를 기다렸던 내 마음은 혼자만의 욕심이었나 보다 하고 마음을 정리하면서도 자꾸만 뒤돌아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그리고 스스로 다가온 그 녀석을 만났던 것이다.

나는 이 아이로 하여금 누룽지와 숭늉 같은 기다림의 지혜를 배웠다. 한 발짝 앞서 실망하고 지치고 포기했던 성급한 선생님을 떠나지 않고 마음을 열어준 아이에게서. 더 오래 기다려 주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과 미안한 마음에 한 달 내 가슴이 아렸었다. 아이들은 늘 나를 기다리게 한다. 길고 아픈 기다림일수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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