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3장 서울 하늘 아래서

▲ <삽화=류상영>
"왜 아뉴. 영동서 학상장에 고무신 팔러 오는 집이 그 집 벢에 읎잖유. 나머지 세 집은 모두 학산 사는 사람들이고. 좌우지간 그 형도 츰에는 가게도 읎이 난전에서 고무신을 팔았잖유. 하지만 시방은 착실하게 기반을 닦았슈. 영동가서 집사고 가게 있으믄 더 이상 멀 바라겄슈."

"에이그, 나도 진작에 모산을 떠야 하는데 구장 노릇 및 년 만에 늘어 난 거는 빛 벢에 읎고, 생긴 것은 주름살 벢에 읎으니 먼 수로 장사를 한다능겨.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까두 말했지만 내가 올 가실에는 틀림읎이 미수를 다 받아 낼 모냥잉께 비료 좀 내 줘. 아! 당장 못자리를 만들라믄 비료가 있어야 하는데 비료를 배급해 주지 않으믄 동리 사람들이 머라고 하겄어? 구장이 중간에서 비료대 다 때처먹었다고 수군거리지 않겄어? 구장질 하느라 내 농사도 지대로 못짓고, 얼빠지도록 동리 일 해 주고 도둑놈 소리 듣게 생겼다 이거여. 그랑께 강서기가 날 좀 도와 줘."

"나도 남자유. 한번 도와준다고 했으믄 내가 면에서 모가지를 당하는 일이 있드라도 도와주는 사람유. 냘이라도 달구지 끌고 오믄 비료를 내 줄팅께 그 걱정은 하지 말고 약속이나 지켜유. 그라고 솔직히 말해서 구장님하고는 상관이 읎는 말이 되겄지만 중간에서 비료대 떼먹고 야반도주 하는 구장들이 한 둘이 아뉴. 어지 신문에서 봤는데 며칠 전에도 강원도에 있는 어뜬 동리 구장놈이 비료대를 삼십 만환이나 떼먹고 야반도주를 했다잖유. 그래서 그 동리 난리가 났대유. 비료 값이 싸기나 해유? 요새 돼지 새끼 한 마리 사천 환씩 한다고 하잖아유. 유안이나 초안 비료가 삼천 환 돈유. 구장이 비료대를 떼먹고 도주했다고 해서 면사무소에서 갚아 줄리는 읎고, 집집마다 냈던 비료대를 두세 번씩 낼라고 해 봐유. 한해 농사 져서 비료대 미수로 안 남기는 것만 해도 다행인데, 냈던 비료대를 또 낼라고 하믄 지둥뿌리 안 뽑히는 집이 워딨겄슈. 난리가 나도 생난리가 났겄지……요새 미칠 술을 안 마시다가 마싱께 입에 착착 달라붙는 구먼. 어서 들어유, 오는 정이 있으믄 가는 정이 있다고 구장님이 두 도꾸리 샀응께 이븐에는 지가 사쥬?"

강서기는 말을 할수록 황인술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슬쩍 말꼬리를 돌렸다.

"우리 동리사람들은 강서기가 아는 것츠름 사는 거시 다 그려. 면장댁이 도지를 끊겄다고 하믄 십에 팔 할은 목구녘에 거미줄 칠 수 벢에 읎구먼. 그릏다고 논밭전지에 비료를 안 뿌릴 수는 읎는 일. 도지 땅이나 많나. 콧구녘만한 땅 농사 져 봤자 도조 준 다음에 이거 띠고 저거 띠다 보믄 비료대가 미수로 남는 거는 어띃게 생각해보믄 당연한 일이여. 그릏다고 비료 외상 안주믄 죽겄다고 목을 놓는 통에 워틱햐. 구장 된 죄로 속 깊은 강서기 한티 매달릴 수 벢에……"

황인술은 강서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바늘이 되어서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도 독한 고량주의 힘을 빌려서 능청을 떨었다. 하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아서 얼굴이 자꾸 굳어지는 것을 느낀다.

"난도, 비록 면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집에 가믄 농사를 짓는 사람유. 구장님이 긴 말 하지 않아도 다 이해 항께 어여 술이나 마셔유. 솔직히 구장님이 저를 도와 주는 거 생각하믄 그까짓 비료대 미수는 아무것도 아니쥬 머. 자! 술 잔 볐응께 어여 한잔 받으셔유."

강서기는 황인술이 비료대를 얼마나 횡령을 했던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쥐도 도망 갈 구멍을 보고 쫓으라고 했다. 당장 횡령한 돈을 갚으라고 하면 황인술도 야반도주 할지도 몰랐다. 야반도주를 한다고 해도 경찰에 고소를 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새로 선출된 구장에게 일을 시키려면 여러 가지로 불편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럴 바에는 황인술을 어르고 달래서 횡령한 돈을 토해 놓게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에 너스레를 떨었다.

"그려, 오늘 이왕 일 못하는 거 강서기 하고 맘껏 마셔 보지 머."

황인술은 탕수육 값하고 고량주 값이 못 나와도 천 환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천 환이면 이백 환 부족한 보리쌀 한말 값이다. 보리를 수확하려면 아직 한 달은 넘게 남아있는 시기라서 보리쌀 한 말이면 닷새는 먹을 수 있다. 동네에서 끼니를 거르는 집이 한 두 집이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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