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스산한 날이면 마음도 좀 슬퍼진다. 그래서 자꾸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게 되는데, 잘 해 준 것이나 보람된 일보다 잘못한 것이나 후회 되는 일이 마음에 남는다.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사는 게 별 거 아닌데도 눈을 뜨면 다시 욕심낼 것이 보이고 아웅다웅하게 된다. 심지어는 봉사랍시고 쫓아다닌 것도 따지고 보니 내 안의 채우지 못한 허전함을 메우려하는 어설픈 짓인 경우가 많다.

길지 않은 삶이 녹록치 않다. 스스로 채워야 할 것도 많고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도 많고 챙겨야 할 일도 참 많다. 그렇게 허덕허덕 살다보니 어느새 훌쩍 나이가 드는 것이고 더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지나버린 시간이 아깝다.

더 의미 있는 일이 무얼까? 미술관에 가면 미술 하는 일이 의미 있을 것 같고, 음악회에 가면 음악 하는 일이 의미 있을 것 같다. 한 가지나마 잘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운 세상에 무슨 의미 있는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연말이 되어 살아온 삶을 자꾸 돌아보게 되는 것은 그래도 인생은 먹고사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있기 때문이고 열심히 바쁘게 사는 것만이 바른 길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의미 있는 일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사는 것일 게다. 나를 위해 살면 늘 부족하고 갈급하지만 남을 위해 살면 풍족하고 기쁘기 때문이다. 나 먹을 것도 없는데 남 줄게 어디 있어?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둘러보면 그러기에는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

인생이 허무하지 않으려면 주어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재능과 소유물을 주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허무와 고독 속에서 방황해야 한다. 찬바람이 더 불기 전에 주어야 한다. 내 소유가 아직 있을 때 주어야 한다.

시신기증은 어떤가?

죽으면 대개 매장하거나 화장을 한다. 매장은 땅속에 묻는 것인데 묻으면 시간을 두며 썩는다. 온갖 미생물이 덤벼들어 파먹을 것이다. 화장을 하면 뜨거운 불에 태워서 가루로 만들어 집안 풍습대로 산에 뿌리거나 납골당 등에 안치한다.

이 마지막 가는 길에 작은 의미 하나 만들 수 없을까?

시신 기증은 죽은 후 병원에서 우리의 후배들이 의학 연구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이다. 인간의 몸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이 필요한데 우리의 고정관념상 시신을 기증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어차피 썩을 몸이고 어차피 죽은 이는 모르는 일이다. 아까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다.

몇 년 전 시신을 기증하였다. 기증서에 서명을 하고 난 순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몸뚱아리를 남에게 주었다는 홀가분함,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좋은 일 하나는 분명히 하게 되었다는 뿌듯함이 아직 내 삶을 움직이고 있다. 삶의 무게도 조금은 덜었다.

▲ 이진영
충북도교육청 장학사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