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삽화=류상영> |
순배영감은 일행 가운데서 끌려오는 자식들을 바라본다.
조선시대 때 죄인처럼 칡넝쿨로 어깨를 휘감아 허리를 동여 맨 형제는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다. 형제를 둘러싸고 있는 동네사람들이 오히려 죄인처럼 주눅 든 얼굴로 땅바닥만 쳐다보며 오고 있다.
"나도 이 동리서 태어났고 이 동리서 이때까지 살았구먼. 이놈들이 뉜지도 잘 알고 있어. 내 눈에는 이놈들이 우리 동리 사람들로 안 보여. 내 눈에는 동리 사람들을 선동해서 우리 아부지 어머를 대창으로 찔러 죽인 놈으로 벢에 안 보인다는 말일씨. 우리 동네 사람이라믄 절대로 한 동리 사람을 그 모냥으로 죽일 수는 없단 말일씨."
이병호는 망설이지 않고 장승처럼 서 있는 순배 영감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이병호가 차갑게 웃는 얼굴에 달빛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순배영감은 형제를 바라보지 않고 이병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이병호는 뒷짐을 지고 마치 순배영감하고 형제들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얼굴로 사방을 돌아다 보며 말했다.
"면장어른!"
이병호를 바라보던 순배영감이 바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형제를 바라봤다. 형제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차마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병호 앞에서 무릎을 착 꿇어앉는 순배영감의 목소리가 달빛을 타고 짜르르 울려 퍼져 나갔다.
아낙네들은 피를 토하는 듯한 순배영감의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아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박태수의 집 나무동가리 뒤나 헛간 뒤로, 김춘섭네 집 뒤, 골목 안에 있는 감나무 뒤로 몸을 숨긴 체 두 눈만 말똥말똥 뜨고 숨을 죽였다. 남정네들은 차마 멀리 가지는 못하고 둥구나무 그늘을 벗어나서 자연스럽게 순배영감 부자와 이동호부자를 에워싸고 마른 침을 삼켰다. 둥구나무 아래는 칡넝쿨에 묶여 있는 형제와 이병호 앞에서 무릎을 끓고 앉아 있는 순배영감과 이동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려서?"
"이 늙은이가 죄인이유. 이 늙은이가 말렸어야 하는데 말리지 못한 거이 죄인이유. 자식들을 어띃게 할 생각이라믄 이 늙은이를 먼저 쥑여 줘유."
"흥, 은제는 공산당이 시켜서 그랬다고 하더니 그새 마음이 변했는개비구먼."
이병호는 차갑게 웃으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하얀색 상아 파이프를 꺼냈다. 권련을 꽂아서 불을 붙였다. 엄지와 검지로 파이프를 든 체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형제를 노려보며 뒤로 물러섰다.
| ▲ <삽화=류상영> |
"아부지! 아부지가 먼 잘못이 있다고 그래유. 이복만이 같은 놈은 인간이 아뉴, 금수와 같은 놈이란 말유. 우리가 쥑이지 않았어도 벌써 이 세상에서 꺼졌어야 할 놈유."
"아부지, 아부지는 어여 집에 들어가 보셔유. 아부지가 저 새끼 앞에서 백 날 용서를 빈다고 해도 우린 죽은 목숨유. 그랑께 자식들이 가는 마지막 눈앞에서 구차한 모습 보이지 말고 어여 집으로 들어 가셔유."
"아부지! 죽는 마당에 아부지가 인간같지도 않은 놈한테 개처럼 사정하는 모습 보기 싫어유, 그랑께 어여 집으로 들어 가셔유."
"아부지! 아부지가 개만도못한 놈들 앞에서 사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으면 너무 억울해서 저승도 못가고 원혼이 돼서 허공중을 떠 돌뀨. 그랑께 어여 집으로 들어 가셔유. 지발!"
형제가 번갈아 가면서 무릎을 끓고 앉아 있는 순배영감에게 발을 동동 구르면서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애원을 했다.
"면장어른 저 자식들 보셔유. 저것들이 시방 염라대왕 앞에서 심판을 지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깨춤을 추고 있을 정도로 저릏게 철이 읎슈. 그랑께 지발 목숨만 살려 주세유. 지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