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류상영>

"면장님, 쇠고삐 갖고 왔슈."
박평래가 쇠고삐를 둘둘 말아서 들고 왔다.
이병호는 박평래의 말에는 대꾸를 하지 않고 잠자코 너럭바위 위로 올라갔다.
잘게 기침을 하고 나서 형제를 빙 둘러 싸고 있는 남정네들을 천천히 돌아다봤다. 남정네들은 이병호와 마주칠 때마다 죄를 지은 것처럼 움찔 놀라도 뒤로 물러선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저 놈들한티 부모가 죽은 사람이 있으믄 앞으로 나와봐유. 기냥 죽은 것도 아녀. 칼날 같은 대창에 수도읎이 찔려서 몸띵이가 벌집츠름 돼서 죽은 부모가 있으믄 이 앞으로 나와 보란 말여. 만약, 그른 사람이 단 한명만 있어도 저 놈들을 살려 줄팅께 빨리 앞으로 나와 보란 말여! 나도 인간이여. 인간잉께 순배영감한티는 저 놈들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귀한 자식이라는 것도 알고 있구먼. 하지만 무참하게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도 내게는 이 세상에 단 두 분벢에 읎는 소중한 분들이란 말일씨. 근데 저 두 놈이 선동을 해서 여러분 들이 쥑잉겨. 우리 아부지가 멀 그릏게 죽을죄를 질 정도로 잘못했다고 벌집을 만들어 놓응겨. 설령 일정 때 우리 아부지가 동리사람들한테 쪼끔 섭섭하게 했다고 쳐! 그기 어디 우리아부지만 잘못이여? 우리 아부지가 잘못한 거라믄 시방 영동경찰서장도 일정 때 헌병이었어. 그 사람 손에 붙잡혀 가서 죽은 이 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은 될껴. 하지만 정부에서도 경찰서장한티 잘못이 읎고, 순전히 시대가 잘못된 것으루다 판명이 났응께 시방은 정부의 녹을 먹는 경찰서장으로 대우를 해 주고 있능겨. 경찰서장만 일정 때 설치고 댕긴 기 아녀. 영동군수도 일정 때 병사계에 근무를 했어. 내가 학산면에 근무를 해서 잘 아는 사실이지만, 대동아 전쟁 때 나가서 죽은 영동군 장정들은 암 잘못 도 읎어. 다 그 사람이 지 멋대로 명단을 작성해서 군대를 보내서 죽은 거여. 하지만 그 사람이 엄한 장정들을 일본군에 입대를 시키고 싶어서 그랑겨? 그 시대에는 그기 법이었응께 그 사람은 직무에 충실했다는 말일씨. 그런 사람들에 비교를 해 보믄 우리 아부지는 양반이여.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우리 아부지 때문에 죽은 부모가 있으믄 앞으로 나와 봐. 외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동리 사람들을 음으로 양으로 돕느라 후지모토한테 얼매나 시달렸는지 이 중에서 알고 있는 사람은 나벢에 읎을껴. 그른데도 그 공을 인정해서 동리 어귀에 공덕비를 세워주지는 못할망정 대창 질을 햐! 여기 있는 사람들 죄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이거여! 규동이 자네는 대창 안 들었는감? 거기 뉘여 춘셉이 자네는 뒷짐지고 귀경만 하고 있었남? 내가 알고 있기루는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


"퇘! 친일파 보다 더 지독한 이병호! 개소리 그만햐! 네 놈도 시방은 잘난 척 하지만 금방 내 뒤를 따라 오게 될껴. 그랑께 엄한 사람들한테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어서 죽여."
"형, 내비둬. 그 새끼에 그 자식이 별 수 있겄어. 우리가 쥑이지 않았응께 누군가 저 새끼들도 대창으로 똥구녘을 찔러 줄이고 말껴. 흥, 암만! 반드시 니 애비 애미츠름 뒈지는 날이 올거여."


이병호가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격해져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때였다. 형제들이 번갈아 가며 이병호를 향해 침을 뱉으며 저주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저 눔들이 명 재촉을 하고 있구먼. 규동이, 쇠고삐를 둥구나무 가지에 걸게."
"지가요?"
"여기 규동이라는 이름이 또 있남?"
"아……알았슈."


윤길동은 떨리는 눈빛으로 이병호를 바라본다. 이병호는 너도 우리 부모를 쥑인 놈 아녀. 라고 노려보는 것 같아서 박평래가 들고 있는 쇠고삐를 받아 들었다.
"향숙이 아부지. 향숙이 아부지를 추호도 원망 안해유. 그랑께 어여 밧줄을 걸어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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