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장 만세 삼창에 술이 석잔

"향숙이 아부지는 아무런 죄가 읎슈. 내가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한테 이병호 저 인간 백정 같은 놈을 빨리 불러들이라고 빽을 쓸 모냥잉께 어여 밧줄을 걸어유."
"그, 그려."
윤길동은 난 니덜한테 죄가 읎어. 라는 말은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쇠고삐를 든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며 빙빙 돌려서 둥구나무 가지를 향해 홱 공중으로 던졌었다.
설마, 그 일 때문에? 아녀, 그를 리가 읎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원한서린 눈빛이 아니었단 말여.
윤길동은 둥글고 좁은 어깨를 굽실거리며 연신 기도를 하고 있는 꼬막네를 바라본다. 신이 접사를 했는지 부들부들 떨며 허공에 대고 용서를 빌고 있는 꼬막네의 모습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예! 장군님! 불쌍하고 어린 청춘을 보살펴 주소서! 예! 장군님 어리디 어린 딸내미가 먼 죄가 있다고……"
제단을 향해 앉아서 어깨를 흔들던 꼬막네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빠르게 돌아앉았다. 반쯤은 정신이 나간 얼굴로 마른 침을 연신 삼키고 있는 윤길동을 노려보고 있다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무릎을 찰싹 때렸다.
"이래도 그짓말을 할겨?"
"우짜믄 좋겄어. 우짜믄 좋겄는지 비방을 내 놔 봐. 응, 우리 향숙이는 절대로 점쟁이는 안된단 말여. 그랑께……지발!……비방을 내 나 봐……"
꼬막네가 날카롭게 묻는 말에 윤길동은 슬그머니 무릎을 끓고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줄줄줄 흘러내려 방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김춘섭은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들어서 나무 장사는 당분간 접었다. 나무를 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날이 더워지면서 땔감용 나무 소비가 현저하게 줄어든데다 가격까지 떨어져서 별 재미가 없었다.
목수 뒷모도는 장작장사 다음으로 돈을 만져 볼 수 있는 기회다. 김춘섭은 이제나 연락이 오나, 저제나 연락이 오나 학산에 볼일 보러 갔다가 오는 사람이 있을 때 마다 배목수의 안부를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배 목수는 황간이며 이원, 옥천, 까지 일을 나가는 모양인데 아직은 뒷모도가 필요 없다는 시큰둥한 반응뿐이었다.
장작장사나 목수 뒷모도를 나가지 않으니까 농사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농사가 많은 것도 아니다. 논농사라고는 도지로 붙이고 있는 샘골에 있는 진논 서마지기가 전부다. 농사꾼이 농토가 적다고 해서 한갓지고 농토가 많다고 해서 정신없이 바쁜 것은 아니다. 많으면 많은대로 바쁘고 적으면 적은대로 바쁜 것이 농사일이다.
김춘섭은 바쁘기는 열 마지기를 짓고 있는 박태수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서 새벽부터 일어나 일을 했다.
오늘도 컴컴한 새벽에 일어나서 지개를 헛간 앞에 세워 놓았다. 겨울이었다면 장작을 지고 가야 할 지게에 바지게를 걸었다. 싸리나무로 만든 바지게는 흙을 퍼 나을 때나, 재 같은 것을 지어 나를 때 사용한다.
헛간에 겨우내 모아 두었던 재를 고추밭에 져내고 나니까 휘뿌염하게 아침이 밝아왔다. 어느 틈에 안개가 걷히고 들판이 내린 이슬이 바짓가랑이를 축축하게 적실 즈음에는 또랑으로 가서 세수를 하고 머리까지 감았다. 삼베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있는데 박태수가 똥장군 지게를 지고 오는 모습이 보인다.
"오늘 및 시까지 라고 했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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