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이 다하여 죽을 때가 된 것을 안 아버지가 자리에 누워 아내와 자녀를 불러 모으고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느꼈던 중요한 인생철학과 가훈과 재산목록과 분배 방법과 평생을 뒷바라지한 아내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통곡하는 자녀들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옆으로 떨구는 장면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마지막을 장식할 때 흔히 나오는 광경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멋지게 죽는 사람은 20%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뜻하지 않은 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요즈음은 교통이 발달하면서 이에 비례하여 사고가 급증하고 있고, 스트레스 때문에 이름 모를 질병도 많이 생기며 자연재해와 폭력피해도 늘어나고 있다. 급박한 세상살이 속에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침 밥 잘 먹고 현관문을 나선 사람이 걸려온 한 통의 전화기 속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을 알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느 날 문득 비보를 접한 남은 자는 얼마나 놀라고 허둥댈 것인가?

미리 유서를 쓰는 것은 이런 일을 예방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글로 써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보람된 일은 유서를 씀으로써 자기 인생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 무의미한 일에 골몰했던 아까운 시간을 정리할 수 있다.

가시돋힌 말로 괴롭혔던 주변 사람들이 떠오를 것이고 그들에게 사과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며,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갚을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고 남은인생을 더 아껴 쓰게 될 것이다.

내가 평생 아둥바둥 쌓은 재물이 얼마 되지 않음을 알고 웃음이 나올 것이고, 앞으로도 벌어봤자 쥐꼬리만큼밖에는 안 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자녀에게 할 말이 많을 것이지만 내가 제대로 살아오지 못했기에 그저 부끄러울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더 사랑 해 주지 못한 것. 소유하려 했던 것,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생각했던 것, 마음 아프게 했던 것 등이 교차할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선과 같이 있고 싶어 했던 슬픈 눈동자, 인정받으려던 갈급한 손길이 생각날 것이다.

배우자에게는 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더 사랑하지 못한 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심하게 다투었던 숱한 날들,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있는데도 마치 내가 홀로 여기까지 왔거나 아니면 나 때문에 그가 여기까지 온 것으로 여기는 착각이 보일 것이다.

모두 털어버려야 할 욕심의 찌꺼기들이다. 다 비우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새 해엔 하얀 종이를 꺼내 놓고, 한 자 한 자 유서를 써 내려가 보자. 인생을 마감할 때 쓰는 유서가 아니라 두 눈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써 놓자.

환하게 앞길이 보일 것이다. 이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가 분명하게 보이고, 엄숙한 나의 인생 앞에 겸손히 고개가 숙여질 것이다.

유서쓰기는 한 세대를 끝내는 작업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서곡이다.

▲ 이진영
충북도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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