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장 만세 삼창에 술이 석잔<188>

▲ <삽화=류상영>

"아…아뉴, 영동 읍내에 볼일이 있어서 가 볼까 해서 나온 길유."
박태수는 농협조합에서 볼일을 다 본 뒤였다. 담배나 한 갑사서 피우며 집으로 자박자박 걸어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옥천댁이 대전에 간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어이구, 부면장님 사모님이 여기까지 웬 일이대유?"
박태수가 옥천댁 앞을 떠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고 있을 때였다. 면직원이 옥천댁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대전에 볼일이 있어서 나왔구만유……"
"지도 군청에 출장을 가는 질유. 면장님은 건강하시쥬? 언지 한븐 인사를 드리러 간다는 기 맨날 생각만 하고 있구만유. 사는 거시 원체 바빠서 통 시간을 쪼갤 수가 있어야쥬."
"말씀만 들어도 고맙구만유. 아버님께 꼭 안부인사 전해드리겄슈……"
옥천댁은 면직원한테 인사를 하고 박태수를 찾아보았다. 박태수는 차표를 끊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있는 박태수의 옷차림은 면소재지에 잠깐 볼일을 보러 나온 차림이지 읍내에 나갈 차림은 아니다.
"저 이가, 워짤라고……."


박태수는 영동에 갈 일이 있었다면 담배를 살 때 표를 끊어야했다. 그렇지 않고 지금 표를 끊는다는 것은 자신하고 같은 버스를 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버스를 같이 탄다고 해서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는 오누이도 아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아서 눈치만 보면서 영동까지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무모하게 버스를 타려고 하는 원인이 나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떨렸다.
버스가 도착했다. 면직원은 옥천댁의 수행원처럼 다른 사람들 보다 옥천댁을 버스에 태운 다음에 탑승을 했다. 박태수는 일부러 제일 늦게 버스에 올랐다.
"등신 같은 짓을 했구먼……."


버스를 탄 박태수는 이내 후회를 했다. 버스 안에는 승객이 몇 명되지 않는데 옥천댁은 운전사 뒷좌석에 앉았다.
그 옆은 빈자리였으나 뒷자리 앉아 있는 면직원이 보는 앞에서옥천댁 옆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영동까지 애만 태우면서 가야 할 것을 생각하니까 안타깝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버스는 자갈이 깔려 있는 신작로에 뽀얀 먼지를 밀어내며 영동을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박태수만 사춘기 소년이 짝사랑하는 소녀의 곁을 가지 못하고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박태수가 충동적으로 영동행 버스를 탔을 거라고 믿고 있는 옥천댁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설마, 안직도 그 일을 간직하고 계시는 건 아니겄지……."


박태수가 동네의 건달도 아니다. 홀아비 오씨처럼 돈 떨어질 때까지는 라디오를 끼고 살며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보내는 게으른 성격도 아니다.
나이든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서 나름대로는 동네에서 부지런하고 근실하게 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남정네다.
그런 박태수가 충동적으로 버스를 탔을 때는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에 있었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몰랐다.
"아녀, 그럴리는 읎어. 절대 그럴 리는 읎어."


창문 밖으로는 4월의 푸른 들판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박태수는 아직도 그날 밤 일을 잊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슴이 마구잡이로 뛰면서 신작로를 따라 서 있는 미루나무며 푸른 들판에 안개가 내려앉은 것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흐릿한 들판 어디선가 박태수의 돌처럼 단단한 가슴이 상체를 드러내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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